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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니오 Oct 27. 2024

#10. 조우

유체이탈이 능숙해진 뒤부터 밤이면 얼마간 유체상태로 있다 잠이 들곤 했어. 그러고 나면 꽤 피곤해지긴 했지만 유체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비하면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처음에는 방안을 돌아다니는 게 다였어. 집 밖을 나서는 건 아직 무리가 있었거든. 하지만 좁은 방안을 유영하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기뻤지. 중력에 구속된 늙은 육신을 벗어나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고요히 어둠 속에 떠 있을 때면 망망대해의 우주 한가운데를 떠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했어. 아스라한 기억 속을 헤매는 것도 같았지. 마치 망각의 바다 깊숙이 묻혀있던 과거의 조각들이 하나, 둘 기억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그건 ‘착각’이 아니라 진짜 ‘기억’이 아닐까? 오래전 유체에 새겨진 희미한 기록같은.


그때부터 유체로 나올 때면 나는 눈앞에 펼쳐진 아득한 공간 속에서 나란 존재의 근원을 찾으려 했어. 우주 곳곳에 흔적처럼 남은 미약한 기억의 자취들을 잡아나가다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 우리의 본질인 우주의 일부로서 우리의 존재 이유를, 생의 의미를.


그러던 어느 밤이었어.


무슨 생각엔가 몰두해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꽤 늦은 시각이더군. 오늘은 그냥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지만 몸의 피로와는 달리 정신은 더 말똥해지기만 하는 거야. 어쩐다.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이다, 이미 늦었는데 조금 더 늦은들 어떻겠나 싶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어.


잠시 후 몸에서 빠져 나온 나는 공중에 가만히 누운 채 그 순간을 음미했지.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어. 물질로서 구속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난 완전한 해방감. 어머니 우주와의 온전한 합일감.


그때였어. 무심히 돌리던 시선 끝에 무언가 걸려들었어.


늘 보던 배경 속 어딘지 모르게 드는 이질감에 뚫어져라 벽 모퉁이를 노려보았지. 그러자 벽지 위로 슬며시 몸을 겹치고 있는 부연 그림자 같은 것이 보이더군. 덜컥 겁이 났어. 유체상태에서 두어 번 다른 유체를 본 적은 있었지만 그런 건 처음이었거든.


그렇게 그것과 한동안 대치를 했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거든. 헌데 돌연 그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 그러자 그게 멈춰서더군. 내 쪽을 향하던 그대로 가만히 선 채로. 마치 뭔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문득 의아해졌어. 


뭘 기다리는 거지? ……나를? …내가 안심하길? 


비웃진 말게나. 그런 걸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도 너무 오래 산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두려움이 사라지자 곧바로 맹렬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더군. 나는 어둠이 뒤엉킨 그 구석으로 향해 가만히 손을 내밀었어. 그러자 그것도 거무스름한 형체를 뻗어왔지. 마침내 서로 닿았다고-명확히 촉감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느낀 그 순간, 뭔가 아릿한 것이 왈칵 전해왔어. 


그리고 나는 깨달았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감각. …… 지훈, 그였어.


처음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저도 모르게 꿈에라도 빠져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진짜였어. 오, 신이시여! 우리는 떨리는 손을 맞잡았어. 연신 팔을 어루만지고 등을 쓸며 서로를 확인했지.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가슴 벅차게 느꼈어.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갑자기 그에게 미세한 떨림이 일기 시작했어. 그리고 채 영문을 알기도 전에 그는 한순간 끌려들 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지. 다시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둔 채.


그래 맞아. 40여 년 만의 만남치곤 너무 짧았어. 하지만 슬프진 않았어. 왜냐하면, 난 알 수 있었거든. 그가 다시 올 거란 걸.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이 가슴 속에 차오르고 있었거든.


그 밤 이후 난 유체이탈을 할 때마다 그를 찾았어.


예상한대로 이따금 그를 만날 수 있었지. 그러면 우리는 서로 마주한 채 못다 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어. 그건 물론 실제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뜻은 아니야. 의식으로 전해지는 일종의 감각같은 거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가 어디에서, 왜 왔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어. 그는 다른 평행세계에서 나를 찾아온 거야. 우리와 달리 시간의 문이 아니라, 차원의 문이 열린 어떤 세계에서. 그날의 사고로 그가 아닌 내가 죽은 세계에서. 그래서 그는 나를 찾아 헤맸던 거지. 이 세계에서 내가 그를 되찾으려 했듯이, 그도 그만의 방식으로 말이야.


그리고 마침내 수많은 평행 우주 속에서, 그는 이 세계의 나를 찾아온 거야.


하지만 그 문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나 봐. 그는 언제나 우리 세계를 잠깐 엿보기만 하듯, 그렇게 잠시 머물다 갈 뿐이었거든.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어. 그렇게라도 서로 만날 수 있었으니까. 서로 닿을 수 없는 두 세계를 그런 식으로라도 공유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흑점 폭발이 있던 그날 아침, 나는 평소와 달리 해가 뜬 지 한참이 지나도록 늦잠을 자던 중이었어. 사실 이 나이쯤 되면 잠이 그리 깊게 들지도 않는데, 그날따라 유독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 같아.


그러다 갑작스레 눈을 뜨고 보니 이미 유체상태로 나와 있더군. 뭐, 그다지 놀라진 않았어. 유체이탈에 익숙해진 뒤엔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으니까. 


정작 내가 놀란 건, 다른 이유였어.


그가 와 있었던 거야. 커튼 뒤로 은은히 비쳐드는 햇살에 감싸인 채 엷은 아지랑이처럼 서서 나를 내려보면서. 밤이 아닌 시간에 그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난 이내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맞았어. 늘 그렇듯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어.


어디선가 시작된 미지의 진동이 일순 우리의 유체를 뚫고 지나갔어. 그러고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단숨에 사방으로 퍼져나갔지. 고개를 돌리자 주위가 온통 파동처럼 일렁이고 있더군.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어.


밖으로 나가자 과연 하늘 한 가운데에서 환한 빛덩어리 같은 것이 굼실거리며 새어나오고 있는 게 보였어. 아니 그걸 빛이라고 해야할까? 그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빛은 아니었어. 정확히 말하면 그 반대였어. 매끄러운 검은 빛. 까만 빛살이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눈부시게 부서지는 그 광경이란…….


우리는 넋을 놓고 그것을 쳐다보았어. 그사이 검은 물감이 번지듯 하늘 위로 조용히 퍼져나가던 빛의 무리가 갑자기 휘몰아치기 시작했어.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곳에 문이 있었어.


우리는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빛의 문 뒤로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보았어.


나무가 뿌리를 뻗듯 끊임없이 분기되며 뻗어 나가는 수많은 우주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빛의 장막들이 겹겹이 러플을 단 드레스처럼 끝도 없이 넘실대고 있었지.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홀연히 문으로 들어서는 거야.


나는 다급히 그를 말리려 하다 깜짝 놀랐어. 그 속의 그는 더이상 부연 형체가 아니었던 거야. 그건 진짜 지훈이었어. 나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그러나 변함없이 믿음직한 그 모습 그대로의. 


그때 그가 손을 내밀었어. 함께 가자는 듯이.


나는 망연히 그 손으로 향했어.


그런데 왜였을까?


문을 넘기 직전 그런 생각이 든 거야. 지금 이 문을 넘어서면 다신 돌아오지 못하겠지? 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 어떤 미련도 없었지만, 너무 급작스레 주어진 선택의 순간에 나는 그만 망설여

버린 거야. 한 세계를 버린다는 건 지금껏 나를 이루어 온 전부를 버리는 일일 테니까. ……어쩌면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 


그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이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다급하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어. 하지만 문을 통과한다고 생각하는 찰나, 돌연 그의 모습이 멀어졌어. 튕겨나듯 몸으로 돌아온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였지. 너무 늦었던 거야.


나는 황망히 밖으로 뛰쳐나갔어. 하지만 시리도록 창백한 늦겨울 햇살 아래, 닿을 듯 가깝던 그의 손만이 잔상처럼 아른거릴 뿐, 이미 이 세계 어디에도 그는 없었어. 


후회와 회한에 찬 불면의 밤들을 보내며 나는 매순간 그날의 우주를 떠올렸어. 무한히 분기되며 펼쳐지던, 같은 듯 다른 우주들. 그는 그 평행 우주의 어느 한 곳에서 나를 찾아온 거야. 아주 긴 세월을 헤매고 또 헤매면서. 


그 날 흑점 폭발로 문이 열린 순간, 그는 그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우연일까? 나는 알 도리가 없어. 그가 어떤 세계에서,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듯이.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유체상태로 그를 찾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어.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 때마다, 어쩌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지곤 했지.


마침내 더는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던 어느 날, 충동적으로 사설을 실었던 거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길 바랐지만, 솔직히 기대는 하지 않았어. 그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절박했던 것뿐이었으니까. 그런 유사과학 축에도 끼지 못할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있을 턱이 없잖은가. 당연하게도 자네 빼고는 그 누구도 연락을 해오지 않더군. 


하지만 운명같은 자네의 방문으로 나는 그동안 혼자서만 생각해왔던 가능성들을 확신하게 됐어. 다시 하늘이 열리면, 우리는 우주를 건널 수 있을 거라고.


자네가 돌아간 이후, 나는 최근의 천체 자료들을 죄다 조사하기 시작했어. 그날의 흑점 폭발에 비견할 만한 우주의 다음 쇼를 찾아야 했지. 하지만 무수한 우주의 별들만큼이나, 무수한 추측들만이 난무하더군. 과연 그 중의 무어가 하늘을 다시 열어줄지 한낱 인간이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지. 어젯밤도 나는 자료들을 비교하며 게중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은 것을 찾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게 소용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더군. 그러자 깊은 무력감이 찾아왔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 누웠지만, 이런저런 상념 탓에 쉬이 잠이 오지 않았어. 그렇게 뒤척이던 중 설핏 선잠에 들었나 봐. 그러다 또 유체상태로 빠져들었던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이 바닥 위로 살짝 떠 있었어.


또 나와버렸나. 씁쓸한 채 몸을 틀 때였어. 습관처럼 시선이 방 귀퉁이로 향하던 찰나, 나는 그만 얼어붙어버렸어. 손바닥만한 창 아래, 까만 어둠이 밤바다처럼 펼쳐진 그 위로 검은 물결처럼 가만히 너울대는 형상. ……그였어. 


나는 제자리에서 망연히 흐느끼기 시작했어. 다시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 해야할 지 알 수 없었거든. 그때 그가 다가오더니 하나의 이미지를 전해주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그건 이 생의 마지막 기회가 분명했어. 


곧 다시 하늘이 열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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