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예의 얼얼한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어스름하게 비쳐드는 창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빈 책상과 의자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응?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떠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수현의 아파트가 아닌 어딘지 낯이 익은 낡은 사무실이었다. 수현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빈 사무용 의자를 마주한 채 다소곳이 앉은 채였다.
여긴 어디지?
그때 아직 먹먹한 귓속으로 작은 웅성거림이 파고들었다. 수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직사각의 넓은 공간 아래 빽빽하지 들어선 책상과 의자. 그 옆으로 보이는 주중 행사, 월중 계획 따위가 적혀있는 칠판과 그 뒤로 보이는 ……태극기?
순간 수현은 소스라쳤다.
그곳은 사무실이 아니라 학교 교무실이었다. 여기저기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교사와 아직 어린 티가 나는 학생들이 일대일로 마주한 채 나직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이게 무슨….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불길한 예감이 섬찟 가슴을 스치는 찰나, 눈앞의 의자가 끼익 섬뜩한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수현의 앞으로 마주 앉고 있었다. 슬며시 올려보자 거기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있었다.
세상에나 ……담임?
놀란 수현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손에 든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과는 결정했어? 내 생각엔… 이과가 좋을 것 같은데.”
담임의 말과 함께 오랜 시간 묵혀두었던 낡은 기억 하나가 눈앞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이……?
등줄기가 서늘해지던 그 순간, 담임 뒤로 무언가 가볍게 팔랑였다.
시선을 돌리자 군데군데 누런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한 벽 위로 그것이 보였다. 그림 없이 글자만 큼지막하게 적힌, 동네 은행에서 나눠주곤 하던 흔한 디자인의 달력. 펼쳐진 페이지 위로 매직으로 커다랗게 동그라미 쳐 놓은 날짜와 글자가 보였다.
2020년 3월 28일. 진학상담일.
수현은 그만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날은 자신이 평생 후회할 결정을 한, 바로 그날이었다.
고교 시절의 수현은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여느 또래들과 다름없이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미래에 대해선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보통의 아이.
그래도 좋아하는 것은 있었다. 시간이 나면 책을 읽거나 뭔가 끄적이곤 했던 수현은 막연히 자신은 문과에 가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고2가 되어 전공을 결정하던 날, 수현의 희망과는 달리 담임은 이과를 추천했다. 이과가 취업에 유리한 탓에 성적이 상위권이던 아이들 대부분이 자신의 성향과 상관없이 이과를 권유받던 시절이었다.
담임과의 짧은 상담 후(상담이라기보단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지만) 수현은 이견을 달지 못한 채 교무실을 나왔다. 여태껏 공부 외에 주체적으로 무언가 선택해 본 적이 없는 그로선, 삶의 유경험자의 조언을 무시한 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은 공부는 어느 순간부터 버거워졌고 성적도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불안하고 힘든 시간을 수현은 억지로 버텨냈다. 묵묵히 참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어른들이 말하는 보장된 미래를 맞게 될 거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견디자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힘겨운 입시를 마치고 좋은 대학의 선호 학과에 합격한 수현은 졸업하자마자 지금의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이후 스스로를 돌아보기 힘들 만큼 바쁘게 살아온 이십여 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현은 사십 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수현은 알 수 없는 허무감에 수시로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업무에 매진하는 중에도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불쑥불쑥 찾아드는 공허함. 수현은 알 수 없었다. 이제껏 앞만 보고 달려가기만 했지, 도대체 무엇을 향해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걸까. 그제야 뒤늦게 수현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네가 진짜 바라던 게 뭐냐고…….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삶이 불행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누가 봐도 썩 괜찮은 삶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높은 급여의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직장. 성공한 삶이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우선이지만 수현 나름의 취미도 있었고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다만 그런 일상 속에 불현듯 찾아드는 까닭 모를 허기를 채울 길이 없었다. 마치 마음이 뻥 뚫려버린 듯한 짙은 허무감.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이 견디기 힘들 만큼 수현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럴 때면 수현은 이따금 그 순간을 떠올리며 자문하곤 했다.
만약에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지친 영혼을 억지로 채찍질하며 사는 대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명감을 안고 하루하루 가슴 벅차게 살 수 있었을까? 하고.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와있다니. 이건 신의 장난인가?
얼떨떨한 채 고개를 들자 잠자코 수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담임이 보였다. 하지만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수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순간의 선택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알 수 없으니까. 잘못하면 여태까지의 삶이, 가족이 모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이대로 돌아가자.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돌아가서 다시 슬립을 요청해 보자.
그런 요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불현듯 묘한 의문이 들었다. 저 사람이 2학년 때 담임이었던가? 3학년 때 담임이 아니었던가? 기억을 곱씹어봐도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30년 전의 기억이 아닌가. 점점 골치가 아파왔다. 5분이 마치 5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예의 기분 나쁜 감각과 함께 수현은 다시 시간의 터널로 빨려 들었다. 영혼이라도 뽑혀나갈 듯한 스산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아오는 속에 수현은 안도감을 느꼈다.
때론 힘겹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수현이 평생을 공들여 이룬 삶이었다. 그 모든 시간들엔 그 나름의 추억과 또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 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뾰족한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그것 또한 수현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숙제일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수현의 세상에 그들이 없는 다른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설사 마음 한구석으로 늘 꿈꿔오던 이상적인 삶이 이 세상 어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몫은 아니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돌아오는 느낌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갈 때처럼 훅하고 빨려 들었다 반대쪽으로 홱 내뱉어지는 느낌.
바뀐 게 없으니 다시 처참한 현재겠군.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여느 때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막 뜨려던 수현은 순간,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누군가 커다란 도끼로 머리를 마구 쪼개는 느낌이었다. 과거의 선택을 바꾸고 나면 바뀐 새 기억과 함께 가벼운 현기증이 일곤 했지만, 이런 격렬한 통증은 처음이었다.
잠시 뒤 간신히 두통이 가라앉는가 싶더니 이번엔 구토가 치밀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다급히 화장실로 향한 수현은 변기와 한참 씨름을 하고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제길, 오늘은 여러 가지로 엉망이군. 찬물로 거칠게 얼굴을 씻어낸 수현은 무심코 고개를 들다 돌연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세면대를 붙잡은 손만이 바르르 떨리는 채였다.
거울 속에 자신이 아닌…… 아니, 자신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과 다른 얼굴이 있었다. 웨이브 진 머리를 뒤로 묶은, 수현과 같은 얼굴을 했지만 훨씬 유들유들해 보이는 사내. 몹시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그의 낯익으면서도 낯선 그 얼굴은 수현인 동시에 수현이 아니었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눈앞으로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 머릿속으로 새로운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떠오른 그 기억들은 수현의 기억들이 아니었다. 이게 다 뭐지?…… 거울 속의 저 남자의 기억인가? ……설마!
욕실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고 나선 수현은 아이의 방이 있던 곳을 향해 몸을 돌리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곳은 막다른 벽이었다. 기이한 추상화 하나가 덜렁 걸린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벽. 어디에도 아이방으로 통하는 문 같은 건 보이지 않는, 단 한 번도 어딘가로 열린 흔적이 없는 단단한 벽.
수현은 낯선 그 사각의 공간을 망연히 바라보다 머리를 감싸 쥔 채 새로 새겨진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이 세계의 수현은, 작가였다. 어젯밤 늦도록 글을 쓰던 그는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고, 조금 전 수현이 터널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눈을 뜬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독신이었다. 이곳엔 아내도, 아이도 없었다. 이 세계의 수현에게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구역이 치솟았다.
위에서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게워낸 수현은 욕실 바닥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것도 바꾼 게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어떻게 두 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고. 그럼 지금 난 누구란 말인가? 대체 왜 이런 세계로 와 버렸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불덩이라도 삼킨 듯 목이 타들어 가고 뱃속이 뒤틀렸다. 수현은 주방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단숨에 비워냈다.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수현은 치솟는 분노에 빈 맥주캔을 있는 힘껏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캔이 심장을 찢는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주방 한 구석으로 굴렀다. 하지만 갈증과 분노는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수현은 비실거리며 소파로 향했다. 거실로 들어서자 수현의 동선을 감지한 홈 시스템이 작동하며 거실 전면 패널로 어디선가 본 듯한 영상이 떴다. 온통 이글거리는 붉은빛에 부신 눈을 가늘게 뜨던 그때, 귀에 익은 아나운서의 음성이 들렸다.
「2050.03.28. 10:40에 시작된 흑점의 대폭발로……」
흡, 수현은 신음을 삼켰다.
열 시 사십 분. 그리고 ……흑점 폭발.
수현은 눈을 부릅뜨고 영상을 노려보았다. 태양의 흑점이 강렬하게 폭발하는 이미지가 거실 벽면 가득 뿌려지며 거실을 환하게 밝혔다. 어쩌면 저것의 영향으로 뭔가 비틀어져 버린 걸까? 절망감에 수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건 꿈이야.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꿈.
이 세계에서나 원래의 세계에서나 수현은 과학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아무리 애써본들 그로서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그저 타임슬립 중 흑점 폭발의 영향으로 다른 평행 우주 같은 데로 빠져든 게 아닐까 추정해 보는 게 전부였다.
그때 문득 슬립 때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그 선생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었는데….
다음 순간 머릿속으로 번뜩 떠오른 생각에 수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여자는 2학년이 아니라 3학년 때 담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나는 이미 내 시간선에서 벗어나 있었던 건가?
수현은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평행 우주라는 것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영화 속의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존재했단 말인가? 하긴 시간이동도 가능한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하필 그 세계에 내가 빠져들다니. 수현이 원한 것은 새로 세팅된 새 삶이 아니라, 원래의 세계로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망연자실해진 수현은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우주의 향연을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수현은 산산이 부서져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는 의식의 조각들을 간신히 부여잡고 책상 앞에 앉았다. 전원을 켜자 테이블 위로 투명한 스크린이 펼쳐졌다. 그 위로 수현의 손가락이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행 우주이론. 평행 우주 간 이동. 종일 인터넷을 뒤지며 수현은 어렴풋이 평행 우주의 개념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도 아직 평행 우주는 하나의 이론일 뿐이었다. 증명되거나 확인되지 않은 무수한 이론들.
그러나 수현에겐 그것은 이론 이상의 분명한 현실이었다. 지금 수현은 우연한 외부의 영향으로 원치 않는 엉뚱한 세계로 와버린 것이다. 그것도 원래의 기억과 이 세계 속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