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5년. 21세기 초반부터 에너지연방을 통해 공동으로 개발 중이던 초전도 핵융합의 장기 안정화가 성공하며, 인공태양을 통한 무한 에너지 공급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한정된 지구 자원으로 인한 에너지난이 극적으로 타개되고,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극으로 치닫던 각국의 분쟁이 수그러들며 전 지구적 안정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정작 이슈가 된 것은 따로 있었다. 초전도 핵융합 과정에서 과거로의 문이 열린 것이다.
핵융합 시 발생하는 엄청난 에너지로 인해 순간적으로 왜곡된 시공간의 통로. 정부는 그것을 ‘시간의 문’이라고 명명했다. 문이 열리는 시간은 단 5분이었지만, 그동안 불가능하다고만 여겨졌던 시간여행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자 사람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후 '시간의 문'은 모두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연방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안정성과 효율성이 입증되면서 2040년대 중반부터 부분적으로 상용화가 허용되었다. 개인도 필요에 따라 시간터널을 이용해 과거로 타임슬립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이전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오늘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슬립은 정부의 철저한 통제하에 허가를 거쳐서만 이루어졌다. 또한 개인에게 허용된 슬립은 사회 전체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몇 시간 안으로만 가능했다. 때로 유력 인사들에겐 더 먼 시간으로의 슬립이 허락된다거나, 정부가 먼 과거로 수시로 슬립을 해서 공익과 상관없이 자기들 입맛에 맞게 사건을 바꾼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떠돌기도 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슬립은 정부 차원의 예방적이고도 공익적 목적(때때로 개인의 사소한 실수가 개인의 사소함을 훨씬 벗어나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외에도, 개인의 일상 속 작은 실수들과 오점들을 되돌림으로써 각자의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시행착오를 줄임으로써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효용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2050년. 타임슬립이 일상화된 시대. 슬립은 이제 현대인의 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 적절한 자격을 갖춘 성인이면 누구나 매년 정해진 횟수의 슬립이 가능했고, 모두들 그것을 당연하게 누렸다. 더 이상 치명적인 실수 하나로 트라우마 따위에 시달리지 않고, 예약버튼 하나면 언제든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리셋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슬립 사용패턴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실제 슬립의 사용률이 대체로 나이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이었다. 노인들은 타임슬립을 많이 사용하지도, 크게 의지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젊은 사람들은 슬립에 쉽게 익숙해졌고, 자주 사용하는 만큼 더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각자 나름의 기준에 따라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안에만 사용하려고 애쓴다 하더라도 젊은 층은 대부분 횟수가 부족하다고 여기기 마련이었다. 조금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완벽하게 삶을 운영해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대개의 경우이고, 수현은 달랐다. 그는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아니면 슬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어떤 개인적인 신념이나 믿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나 할까. 슬립기계에 들어앉는 것을 태닝기계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볼 때면 수현은 혼자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어찌 됐든 시간은 그저 자연스레 흘러가는 게 맞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지금까지의 커리어와 그동안의 수고를 허사로 만들 수는 없었다. 삶의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지 않는가.
반드시 제대로 돌려놓으리라. 수현은 이를 악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내리듯 내린 수현은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바지에 비비며 다급히 정문을 나섰다. 예약한 무인 택시가 기다렸다는 듯 수현 앞으로 멈춰 섰다.
“안녕하십니까. 이수현 님.”
워치를 인식한 택시가 문을 열며 익숙한 기계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굳은 얼굴로 택시에 오른 수현은 안전벨트를 맨 뒤 좌석에 몸을 기댔다. 이내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떠오른 택시는 곧장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정면 홀로그램 화면이 켜지며 유명 아이돌을 내세운 현란한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현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생각에 잠겼다. 눈앞에서 아찔한 속도로 엇갈려가는 다양한 기종의 택시들처럼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가로질렀다.
괜찮아, 슬립만 하면 다 잘 될 거야. 입술을 뜯으며 초조한 마음을 애써 달래고 있는데 광고 뒤로 현재시각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ㅇㅇㅇ가 정각 10시를 알려드립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곧장 워치를 확인했지만 슬립허가는 아직이었다.
제길! 수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뒷머리를 좌석에 찧었다. 그때 뉴스가 시작되며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시 뉴스입니다. 오늘은 최근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흑점 폭발에 관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또 한 번의 거대 흑점 폭발이 있을 예정으로…… 그러나 사실상 지구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며…….」
훗, 흑점 폭발이라……. 하긴 우리 사장도, 나도 폭발 일보 직전의 상태이긴 하지.
쓴웃음을 짓고 있는 사이, 뉴스는 낯선 어느 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전해드릴 뉴스는 초신성 대폭발에 대한 뉴스입니다. 일단의 과학자들이 약 500광년 정도 떨어진 한 초신성의 대폭발에 대해…….」
오늘은 무슨 과학특집뉴스인가? 낮게 툴툴거린 수현은 머리 아픈 얘기 대신 ‘마음을 다스리는 스트레스 해소음악’이라든가 ‘들으면 바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연의 소리’ 따위를 선곡해 볼까 하다 말았다. 어차피 곧 도착할 것이고 슬립 허가만 떨어지면 모든 일이 깨끗이 해결될 터였다. 걱정할 것은 전혀 없다. 수현은 눈을 감고 좌석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어 긴 날숨을 뱉었다.
앵커의 멘트 뒤로 과학자와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용인즉, 수년 동안 관측해 온 이래 최근 유의미한 변화들이 관찰된 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 초신성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운이 좋으면 이번 세기에 그 희귀한 현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흐응, 하며 수현이 고개를 까닥이던 그때, 살짝 달뜬 노학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구에서 이 정도 거리의, 이런 거대 초신성이 폭발하게 된다면 지구상의 누구나 그 현상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낮처럼 환해진 두 개의 달이 뜬 밤이 며칠이나 계속될 거예요. 물론 이 별까지의 거리가 500광년이니까 현장에선 이미 오래전에 폭발했다는 이야기이지만요.」
수현은 어쩐지 그 얘기가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까마득한 예전에 죽어버린 별의 마지막 순간이 이제 와서 지구에 도달한들 그게 우리 사는 데에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만도 버거운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타임슬립센터 앞 광장에 도착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튀어나오듯 택시를 내린 수현의 발밑으로 단조로운 물결무늬 보도블록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광장 중앙으로 햇빛을 받아 물고기 비늘 같은 매끈한 은색 외벽을 번득이고 선 타임슬립센터가 보였다. 첨탑처럼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선 그 모습이 언제나처럼 위압적이었다.
언제 봐도 썩 정감 가는 외양은 아니란 말이지, 속으로 생각하며 수현은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