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항구의 아침을 연상시키는 낮은 알람음이 천천히 침실 안으로 퍼져나갔다. 알람과 동시에 눈을 뜬 수현은 옆자리의 아내라 깰세라 재빨리 알람을 끈 뒤, 주위가 다시 정적을 되찾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사방은 아직 희붐한 어둠 속에 잠긴 채였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새벽 여명이 아내의 얼굴 위로 엷게 드리워지며 부드러운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수현은 곤히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아내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드디어 디데이다.
수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오늘은 수현에게도, 그의 가족에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회사의 주력사업 분야에 대한 투자설명회가 예정되어 있는 날로, 그 책임자가 바로 수현이었다. 오늘의 브리핑 결과에 따른 투자성사 여부에 올해 회사의 주요 사업계획들이 줄줄이 엮여있었다. 때문에 수현의 회사에서의 입지는 물론이고 가족의 미래 또한 여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여러모로 물밑작업을 하며 갖은 공을 들인 것이 여러 달. 하지만 정작 오늘, 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침실을 나온 수현은 어깨를 번갈아 앞뒤로 돌리며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그러다 돌연 발걸음이 멈춰 섰다.
아이방 앞이었다.
수현은 실내화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쓱 손목 위의 워치를 훑었다. 잠시 후 끙, 앓는 소리와 함께 수현은 아이의 방으로 들어섰다.
옅은 어둠에 싸인 방안에는 보드랍고 평화로운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달큼한 피부내음과 가벼운 솜털이 오르내리듯 한없이 여린 숨소리. 깊게 숨을 들이켠 수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한동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학교에 갈 나이이지만, 녀석의 통통한 볼을 보고 있자면 여전히 처음 마주하던 그때처럼 감격에 젖어버리곤 한다.
늦게 가진 아이여서일까?
아니면 아이라는 존재가 원래 이런 걸까?
녀석을 보고 있자면 수시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이 감정이야말로 지구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을 유일무이한 것이 아닐까?
수현은 이런 아름답고도 불가사의한 존재를 자신에게 보내준 미지의 누군가에게 감사를 전하다, 순간 몸을 움찔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솟고 있었다. 녀석의 양 볼을 어루만지며 힘껏 껴안고 싶은.
수현은 양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만은 참아야 한다. 실수로라도 이 녀석을 깨운다면 뒷일은 보장할 수 없을 테니까.
턱밑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누른 수현은 조그맣게 인사를 건네며 방을 나섰다. 닫히는 문 뒤로 아이의 작고 여린 실루엣이 사라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미지근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서 수현은 머릿속으로 브리핑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 좌중을 휘어잡으며 분위기를 주도해 가는 이미지를 몇 번이고 그리면서. 꼼꼼히 닦아놓은 거울 위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물방울처럼 모든 것이 매끄러웠다. 좋아, 이대로라면 완벽해. 긴장이 풀린 수현은 수압을 좀 더 높이고 눈을 감았다. 은근한 온기와 함께 기분 좋은 흥분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7시 30분.
아내가 미리 말끔히 다려놓은 슈트로 갈아입은 수현은 막 내린 커피와 전날 저녁 준비해 둔 샌드위치를 곁들이며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한 번 더 반복했다. 흡족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자 눈앞에 깔끔하게 자른 짧은 커트 머리의 중년 남자가 보였다. 냉장고 전면 디스플레이 화면에 비친 그는 오늘따라 제법 핸섬해 보이기도 하고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수현은 그 남자에게 씨익 한 번 웃어주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투자설명회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브리핑 직전에 수현은 갑작스레 격한 복통을 느꼈다. 아침에 먹었던 샌드위치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수현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좌중에게 양해를 구한 뒤 화장실로 달렸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직원들의 얼굴을 뒤로한 채.
결국 예정보다 몇 분 늦게 시작된 브리핑은 이미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주요 투자처 인사들의 집중력은 떨어져 있었고, 뒤늦게 그 시선들을 잡아보려 준비하지도 않았던 미사여구까지 동원해 가며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투자계약은 잠정 보류되었다. 빠르면 다음 분기에 다시 의사를 타진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때의 책임자는 수현이 아닌 다른 누군가일 터였다.
사장의 호된 질책을 받고 나오자마자, 수현은 워치 위로 스크린을 띄웠다. 아침의 일을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슬립요청시각 : 2050년 3월 28일 오전 7시 30분]
서너 시간 안쪽의 슬립이면 허가가 쉽게 떨어질 터였다. 예약접수를 확인한 수현은 곧바로 무인 택시를 호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