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을 밀치고 겨우 몸을 욱여넣어야 하는 출근길의 지하철, 회사원들로 혼란스럽게 북적거리는 점심시간의 식당, 꽉 막힌 도로 위 차들의 시끄러운 경적까지. 출근길에 뒤엉켜 움직이는 직장인들을 볼 때면 가끔 구역질이 날 것처럼 속이 일렁였다. 스무 살 때 여수에서 올라와 지칠 대로 지친 복잡한 타지 살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열정은 비 맞은 불씨처럼 사그라들었다. 어느 순간 내 삶은 흐릿한 무채색이었다.
결국 나도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에 포함되는 요즘 애들인 걸까. 아니면 혹시 내가 ‘IT 보안 엔지니어’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걸까. IT 보안 엔지니어는 고객 컴퓨터의 보안을 위해 백신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장애 상황에 대응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악성 코드에 감염되었다거나, 우리 회사의 백신 프로그램이 오류가 발생한 경우 문제를 해결해주는 업무다. 그렇다 보니 문제가 이미 발생해버린 상황에서 잔뜩 화가 나있는 고객들을 상대해야 한다. 일이 아니라 분노로 가득한 사람들한테 지쳐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직장 생활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싫은 것은 또 아니었다. 엔지니어로서 문제를 해결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 따박따박 통장에 꽂히는 월급, 다달이 들어오는 복지비까지 나름 안정적인 생활이라 만족하고 살 수는 있었다. 특히, 회사 동료들이 좋았던 것도 직장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큰 힘이었다. 아무리 하루가 피곤해도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고 주말에 만나서 시간을 보낼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쉬는 날만 기다리며 매일매일 똑같이 흐르는 일상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수십 년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집 하나 가질 수 없다는 미래가 허탈했다. 한 번뿐인 내 인생인데 과연 시간을 맞게 보내고 있는 건지 점점 확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마음이 헛헛하다는 이유만으로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하기에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가족들을 떠나 혼자 서울살이를 하며 전세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물과 전기를 썼으니 관리비도 내야 하고, 먹고살자고 하는 거라 밥도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무작정 사직서를 던질 수 있겠나. 결정적으로 월급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다. 매일같이 퇴사할 거라고 말만 하는 양치기 소녀가 되어 있었다. 퇴사와 앵무새를 합친 말로 거짓말쟁이 퇴사무새라고 불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예능이나 유튜브에서 자신과 다른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부캐(*부 캐릭터)가 유행인 시대인데, 나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여러 모습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꼭 회사를 그만둬야만 도전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무채색으로 변한 내 삶을 파스텔 톤으로 물들여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