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과 3일 정도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애써 행복 회로를 돌렸다. 가구 공장에 가셨으니 스터디 카페 가구를 제작하느라 바쁘시겠거니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면 거의 3주를 공사 현장에만 있었는데 3일 정도는 쉴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CCTV로 보는 현장은 불이 꺼진 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표님 많이 바쁘신가요? 다음 일정은 언제 시작하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려요."
그 뒤에도 몇 차례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했지만 1이 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숫자 1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옆을 봤더니 동업자인 남자 친구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마 내 표정도 별 다를 건 없었을 거다. 전화를 걸어도 똑같았다. 계속해서 연결음만 이어졌다. 한 번, 두 번 그 이후로 몇 번을 시도했는지 모르겠다. 대표님 번호, 회사 번호 모두 연락 두절이었다. 혹시 우리 연락만 받지 않는 건가 싶어 친구들을 시켜 전화를 걸었다. 차라리 연결이라도 되면 이게 무슨 일이냐며 따졌을 텐데 다른 전화도 받지 않았다.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현수막에 개업 예정이라고 적어뒀던 날짜는 이미 지났고 텅 빈 공간에 월세도 내야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밤에는 계속 악몽을 꾸거나 깊게 잠들지 못했다. 벨소리만 들리면 드디어 연락이 왔나 싶어서 휴대폰을 잽싸게 집어 들었다. 긴장감에 심장이 쿵쾅쿵쾅 튀어나올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전화 연락 중 대표님의 연락은 없었다. 나보다 배로 돈을 투자했던 동업자인 남자친구는 스트레스로 위염에 걸려 고통스러워했다. 회사에서 어떤 상황에도 침착했던 사수였는데 멘털이 으깬 두부처럼 뭉개졌다. 우리 둘 다 가진 전재산 투자에 대출까지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사는 이미 절반 이상 진행을 완료했고 그렇다고 돈을 다 지급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워낙 사기가 비일비재하니 돈을 인테리어 단계별로 지급해야 한다고 알려주신 것도 대표님이었다. 사기였다면 돈을 많이 훔쳐서 사기꾼한테도 이익이 남아야 하는데 우리는 진행한 만큼만 지불했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연락이 끊긴 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다 사장님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 소름 돋는 글을 발견했다. 같은 인테리어 업체는 아니지만, 우리랑 똑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있었다. 저렴하게 견적을 받고 진행하다 작업 후반부에 업체 손해가 커지니 그냥 포기하고 잠수를 탔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큰 계약건이 생기면 이익이 별로 없는 현장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상황이 흔한 일이라고 했다. 이런 개념 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일치하는 상황이라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계약서에 아직 도장을 찍지 않은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대체 왜 계약서도 없이 이 큰일을 진행했는지 의아해했다. 우리는 당연히 확실하게 도장부터 찍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 공사를 진행하다 보면 자제나 인건 비용이 더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단계별로 작업이 끝날 때마다 수정본 계약서를 작성했고, 계속 변동이 있으니 도장은 마지막에 찍자고 말하길래 원래 그런 줄 알았다. 남자 친구는 계속 찜찜하다고 계약서 도장을 찍는 게 맞지 않냐고 말했었는데, 걱정이 너무 많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나 자신한테 죄책감이 들었다. 크게 걱정 없는 성격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재산이 날아갈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둘 다 미쳐버릴지도 몰라서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신고라도 해야 하나 싶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전화가 연결되어 놀란 마음에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신호음도 가지 않았고 당황한 목소리 톤으로 보아 실수로 전화가 받아진 듯했다. 아무렇지 않게 지금 정신이 없어서 다시 연락 주겠다고 하고 끊어버려서 더 황당했다. 주변은 굉장히 웅성웅성 소란스러웠고 역시 다른 공사를 진행하는 게 틀림없구나 싶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계약서가 없어서 신고도 무의미한데 차라리 직접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과 초반에 만났을 때 인천에서 대형 스터디 카페 공사를 진행 중이라고 해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분주한 목소리로 봐서는 거기 공사에 문제가 생겨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촉이 왔다. 신발끈을 단단히 고쳐맸다. 지금 거기에 있던 없던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인천까지 가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입은 바싹바싹 말랐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인기차트를 재생했더니 아이유의 '라일락'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본인의 20대에게 기쁜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하는 아이유의 노래와 20대 내내 모은 전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한 우리의 상황이 너무 대조적이었다. 착잡함, 후회, 걱정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채 인천으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정신없이 상황을 정리 중인 대표님 목소리가 들렸다. 매일같이 대표님과 연락이 닿는 꿈을 꿨는데 이것도 환청일까 혼란스러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만 돌면 바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막상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아무렇지 않게 너스레를 떨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차마 코너를 돌지 못한 채 벽에 기대 손만 붙잡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손에서 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고통받은 시간을 생각하면 화도 났지만 일단 상황을 나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우리가 고객이긴 하지만 금전적으로 많은 투자를 받았고 일단 개업해야 했다. 그래서 속상한 마음은 꾹꾹 눌러 담고 마치 약속이라도 하고 온 듯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 들러봤어요. 요새 이것저것 정신없으시죠."
대표님은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미안하다고 손을 잡았다. 이럴 수가 있는 상황인지 기가 막혔다. 알고 보니 인천 공사 현장에서 금전적인 사기를 당했고, 교통사고에 화재까지 나면서 다른 것은 챙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연락 한 통만 해줬으면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2주는 아니었을 거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문자 한 통만 남겨줬어도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쁜 상황 속에서 우울증 증상까지 심해져 모든 걸 다 포기해 버렸었다는 말을 들으니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이런 적은 본인도 처음이었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스터디 카페 가구는 남편이 모두 제작해 놔서 개업은 빠르게 가능하다고 사과했다.
따지려면 따질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여기서 화내고 끝내버릴 수가 없었다. 그냥 별 탈 없이 개업하고 싶었다. 사실 대표님이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2주 동안 피 말린 시간은 보상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냥 무사히 시작할 수 있다면 정말 다 괜찮았다. 대표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안도감에 속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4월 초의 밤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고 봄이 오는 냄새가 났다.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아이유의 '라일락' 노래처럼 달콤한 기분이었다.
다행히 창업은 성공적이었다. 이용자들은 공부하기 너무 좋은 공간이라며 모두 만족해했고, 책상을 어디서 구매할 수 있는지 문의가 오기도 했다. 시험기간에는 자리가 부족해서 대기 인원이 생길 정도였다. 대표님의 실력은 결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책임감과 실력 그 사이에서 많은 생각이 드는 경험이었다. 개업 이후에도 자잘한 하자 보수가 필요했는데 역시나 연락이 되질 않았다. 한 번은 전기 공사가 일부 잘못되어서 콘센트를 꽂기만 하면 불이 꺼지는 좌석이 있었다. 스탠드도 쓸 수 없고 충전도 못하니 이용자들에게 문의가 계속 왔다. 인테리어 업체는 연락이 되지 않으니 결국 다른 전기 업체를 불러 수리를 했다. 전선이 반대로 되어있어서 콘센트를 꽂으면 차단기가 자동으로 내려가는 문제였다고 뚝딱뚝딱 고쳐주셨다. 공사 중 일부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 태도가 너무 무책임했다. 심지어 전자세금계산서 요청도 무시했다. 지출에 대한 증빙이 되지 않으면 수익만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과도한 세금이 발생한다. 투자를 많이 해줬으니 세금 계산서는 발행해주지 않겠다는 생각인 건지 무작정 숨어버리는 태도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과연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 직접 찾아가지 않았다면 다시 돌아왔을까 의문이 든다. 대표님은 세상 살다 보니 나쁜 어른이 많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는데, 그녀에게 나쁘다는 기준은 어떤 것이었는지 참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몰랐던 막막한 상황 속에서 대표님께 많은 것들을 배웠고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좋은 기억만 안고 가려고 한다.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연이 이어지지 않아 조금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고 ‘사장님 부캐’는 스터디 카페를 개업했다. 요즘은 고사를 진짜 돼지머리가 아닌 돼지 머리 케이크로 대신하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개업 날짜에 맞춰 주문 제작한 케이크를 받아 초에 불을 붙였다. 두 손을 꼭 잡고 고생한 만큼 잘 될 거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분홍빛 얼굴에 환하게 웃고 있는 돼지가 우리를 행복한 미래로 데려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도 모두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개업하고 한동안은 친구들이 보내준 선물들이 도착했다. 돈나무라 불리는 금전수를 받으니 윤기 나고 풍성한 잎만큼 돈이 막 굴러들어 올 것 같았다. 식물 모양 디퓨저나, 화환까지 받으니 내가 사장이 되긴 했구나 실감이 났다. 그럼 이제 '돈 길만 걸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이 이야기가 끝이 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프롤로그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