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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무 Mar 31. 2022

[Lv.17]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이 곱지 않다.

 '고객은 왕'이라는 것도 다 옛말인데 여전히 본인이 왕인 것 마냥 구는 사람들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는 갑질 논란이 쏟아져 나오곤 한다. 그런 뉴스를 보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끝까지 보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난다. 최근에는 배달 기사에게 돌아가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라고 한 사연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렇게 대할 수가 있을까. "내 돈 내고 서비스를 받는데 이 정도 행동이 뭐가 문제지?"라고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개념도 없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직장에서도 고객에게 을이고, 스터디 카페 운영을 할 때도 손님들한테 을이라서 늘 버릇처럼 감정을 삼켜왔다. 손이 떨리게 화가 날 때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주먹만 꽉 움켜쥐고 참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으면 흐르지 않도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버텼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 눈물을 참을 걸 알기에 어디서든 좋은 손님이 되고 싶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힘이 있다. 일에 대한 보람이 느껴지기도 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늘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말했고, 무언가 요청을 할 때도 부탁하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이 곱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하루는 남자 친구와 스터디 카페 물품을 사러 근처에 있는 다이소에 갔다. 보통 이마트와 다이소에서 장을 보는데, 두 군데 다 대형 규모이기 때문에 물건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다이소는 이름처럼 모든 생필품이 다 있는 곳이라 찾고 있는 물건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날따라 철수세미를 도저히 못 찾겠어서 직원 분께 여쭤보았다.


 "죄송한데, 혹시 철수세미가 어디 있을까요?"


 "하. 10번이요."


 안경 너머로 흘겨보는 눈초리와 한숨 섞인 목소리에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줄 알았다. 그래도 그냥 감사하다고 하고 10번으로 가서 두리번두리번 찾고 있었다.


 "아니 안 보이세요? 제일 아래줄이 철수세미잖아요. 10번이라고 말했는데도 왜 못 찾으세요?"


 10번에 수세미 종류만 스무 가지는 되는 것 같아서 고르고 있었는데, 멀리서 계속 짜증이 잔뜩 섞인 투로 소리치듯 말하니 주변 사람들도 모두 쳐다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리는 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왜 굳이 지켜보면서 짜증을 내는지 어이가 없었다. 말투는 직원과 고객 관계를 떠나서 어떻게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저런 식으로 말하지 할 정도로 까랑까랑했다. 기분이 나빠도 그냥 참고 가려고 수세미를 집어 들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위에서 계속해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오늘 일도 많고 바빠 죽겠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물어보냐. 이거 짐도 무겁고 힘들어 죽겠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기분 좋은 주말 아침이 완전히 망가졌다.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여러 사람들이 계속 물어보니 짜증이 쌓여서 분풀이를 한 것 같았다. 대체 왜 고객일 때도, 사장일 때도, 직장인일 때도 어딜 가서나 짜증 섞인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너무 화가 났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갈 때마다 울컥하는 감정은 더 깊어졌다. 계속 기분이 상한 채로 있자 남자 친구가 올라가서 이야기할까 했지만 그러면 싸움만 날 거 같았다. 싫은 소리 잘하지도 못하는 둘이서 따져 물어봤자 기분만 더 나빠질 상황이 뻔히 보였다. 그러다 마침 옆에 총괄 매니저분이 계시길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신기하게 내 이야기만 듣고 단발머리에 안경 쓰신 여성 직원분인지 물어봤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나 보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직원 교육은 다시 한번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매니저님께 사과받고 싶은 게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이용에 불쾌할 수 있고 저도 너무 속상해서 말씀드렸어요."


 가장 기분이 나쁜 건 스스로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너무 착하게 이야기하니 만만한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식당에서 테이블이 너무 더러워서 혹시 한 번 더 닦아주실 수 있는지 물었는데, 원래 이런 거라고 말하며 홱 가버렸다. 하지만 다른 테이블에서 누가 봐도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은 여성분이 따지면서 컴플레인을 걸자 말없이 테이블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저 사람으로서 예의를 지키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며 살고 싶었는데 내 행동이 잘못된 건가 싶어졌다. '착하게 살면 호구다.'라는 말을 굳이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게다가 착한 일을 하고 욕을 진탕 먹은 일도 있었다. 버스에 앉아있는데 다리가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버스에 오르셨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다리를 달달 떨면서 할아버지가 느리게 걷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서 여기 앉으시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시며 의자에 앉으셨다. 마을버스는  거칠게 오르막길을 내달렸다. 손잡이를 잡는 것만으로는 몸이 넘어질 듯 휘청거려 한 손은 의자를 꽉 잡아야 할 정도였다. 정류장에 멈췄다가 출발할 때마다 목이 뒤로 꺾이듯이 넘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미리 내릴 준비를 하시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한테 어서 앉으라고 말씀하시며 의자를 짚고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셨다. 아마 버스 기사 아저씨가 눈치를 줘서 미리 일어나 준비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뒷문에 도착도 하기 전에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다급하게 버스 벨을 대신 눌렀고 다행히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그다음 정류장에 내릴 예정이셨고 걸음이 느리기 때문에 한참 전에 일어난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야기를 듣고 바로 기사님께 벨을 잘못 눌렀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반말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생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말을 반복하며 고함을 질렀다. 운전도 급발진하시더니 성격도 급발진이었다.


 "지금 장난해? 왜 잘못 누르냐고. 장난하냐고. 벨을 내릴 때 눌러야지 왜 잘못 누르냐고. 지금 나랑 장난친 거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있었다. 덩치 큰 기사 아저씨가 소리치니 겁을 먹은 것도 있지만,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이라 뇌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주변에 등산복을 입으신 아주머니 다섯 분 정도가 계셨는데, 내가 안쓰러웠는지 기사 아저씨한테 상황을 설명하며 그만하라고 했다. 그날은 약간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겁을 먹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서는 착한 일을 한 주인공은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는 악당은 벌을 받았는데 현실에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요즘은 흥부처럼 참고 살면 착하다고 칭찬받는 게 아니라 호구 취급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까치다리 부러뜨려 잘 살고 싶진 않은데 내 방식대로 사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속상할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도 하고, 사이다를 원 샷한 것처럼 시원하게 대처하지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소중한 나 자신이 계속 상처받게 두지는 않을 거다. 흥부도, 놀부도 아닌 나대로 사는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보려 한다. 사람에게 상처 주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나만의 방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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