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말을 잃는다. 지난 주, 나보다 어린 청년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이번 주, 나보다 10살 많은, 네 아이 아빠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죽음은 매정하다. 상황을 봐주지 않는다. 청춘이고 뭐고 없다. 아직 한참 더 '아빠'라는 존재만이 줄 수 있는 애정을 느껴야 하건만, 죽음은 정상 참작을 해주지 않는다. 지나치게 냉철해서,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깊은 상처를 낸다.
나는 왜 아직 살아있을까? 건강 관리를 그래도 좀 잘 해와서? 목숨을 잃을뻔한 상황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서?
그들은 왜 죽었을까? 운이 좋지 않아서? 하필 그 시각 그 자리에 있어서? 바쁘고 분주한 나머지 몸에서 보내는 이상신호들을 무시해서?
나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적당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그래서 말을 잃는다. 죽음의 심연 앞에 나의 잡념들은 초라하고 덧없다.
죽음이 두렵다. 나의 두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미처 다 보지 못하고 죽을까 두렵다. 아이들이 나보다 먼저 죽을까 두렵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슬픔을 계속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두렵다. 한 번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 같아 두렵다.
아내와 함께 혼주석에 앉아 아이들의 결혼식을 보고 싶다. 아이들이 각자 자기 가정을 꾸리고 그들과 닮은 자녀들을 키우는 걸 보고 싶다. 손자 손녀를 품에 안아보고 싶다. 손자 손녀에게 세뱃돈을 쥐어주고 싶다.
나의 아이들이 '아빠!'라는 호칭을 오래도록 부를 수 있도록 오래 살고 싶다. 엄습하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최대한 적게 후회하며 살고 싶다. 작은 아름다움에도 감탄하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살고 싶다. 어차피 다 이해할 수 없는 게 죽음이라면, 마음 한 켠에 자리를 내어주고 벗하며 살고 싶다. 모든 걸 끝장내는 죽음에게 담담하게 미소 지을 수 있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이들에게 나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따질 뿐이다. '왜 그러셨냐고' '이렇게까지 꼭 하셔야 했냐고'. 동시에 눈을 감고 간청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버티고 버틸 힘과 위로를 전해달라고. 슬픔과 눈물, 상실감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생의 의미를 찾게 해달라고, 조용히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