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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May 02. 2024

걷기, 독기, 생기

걷자, 오늘도 걷자. 계속 걷자.  



발걸음을 내딛는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발바닥으로 지면을 힘차게 민다. 꿍한 마음, 답답함, 쌓인 화가 조금씩 부스러진다. 흩어진다. 풀내음과 아카시아 향기를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렇게 속이 환기된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잡념들이 사라진다. 걷는 동작이 흐름을 탄다. 다리와 팔의 움직임이 경쾌해진다. 지면을 내딛는 발바닥의 감촉 , 얼굴을 스치는 바람, 신록의 잎들에 취한 눈이 혼연일체가 되어 문제와 번뇌들을 저만치 떨궈낸다.



비 오는 날에는 비를 듣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지는 듯한
추위를 맛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매일매일 좋은 날> _ 모시리타 노리코



걸으며 생각한다. 주변 인간들 때문에 짜증이 나는 오늘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떨어지는 프로젝트 때문에 마음이 짓눌리는 오늘이라도, 그래도 나름대로 소중한 하루라고. 감내하며 안고 가야하는 하루라고.  이런 날들이 며칠 베이스로 깔려야 중간중간 찮은 하루도 만나게 되는 거라고.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쌀쌀하면 쌀쌀한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괜찮은 하루인 거다. 아, 그런데 미세먼지 나쁨인 날은 좀... 아니다. 그런 날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춥건, 덥건, 그저 공기가 깨끗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테니.



오늘도 걷는다.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린다.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을 생각한다. 이따가 조금만 더 체크하고 보완해 보자고. 한 걸음만 더 진행시켜 보자고 되뇌여 본다. 작게 작게 나눠서 하다 보면 어떻게든 또 되겠지. 될 것이다. 그렇고 말고. 어느새 보면 한 고개 또 넘어가 있을 거다.



오늘도 다시 걷는다. 생각할수록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인간들의 면상이 떠오른다. 대놓고 앞에선 뭐라 할 순 없으니 오솔길 바닥에 그들의 얼굴이 펼쳐 있다 상상해 본다. 나는 그들의 면상을 보지 않고 시선을 앞으로 한 채 걸어간다. 사뿐히 즈려밟고 경쾌하게 발을 딛는다. 너는 계속 진상을 부려라, 나는 내 갈길 가련다. 푸르른 잎들과 초록 향기들이 나의 주문에 힘을 실어 준다.



걷자, 또 걷자. 화가 옅어질 때까지.

걷자, 또 걷자. 응어리가 흐물렁해 질 때까지.


걷기는  내게 디톡스의 시간.

독기를 빼어내고 생기를 채워 넣는 시간.


걸으며, 나는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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