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안 Apr 18. 2024

죽음 앞에 말을 잃는다.


죽음 앞에 말을 잃는다. 지난 주, 나보다 어린 청년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이번 주, 나보다 10살 많은, 네 아이 아빠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죽음은 매정하다. 상황을 봐주지 않는다. 청춘이고 뭐고 없다. 아직 한참 더 '아빠'라는 존재만이 줄 수 있는 애정을 느껴야 하건만, 죽음은 정상 참작을 해주지 않는다. 지나치게 냉철해서,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깊은 상처를 낸다.



나는 왜 아직 살아있을까? 건강 관리를 그래도 좀 잘 해와서? 목숨을 잃을뻔한 상황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서?    



그들은 왜 죽었을까? 운이 좋지 않아서? 하필 그 시각 그 자리에 있어서? 바쁘고 분주한 나머지 몸에서 보내는 이상신호들을 무시해서?



나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적당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그래서 말을 잃는다. 죽음의 심연 앞에 나의 잡념들은 초라하고 덧없다.



죽음이 두렵다. 나의 두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미처 다 보지 못하고 죽을까 두렵다. 아이들이 나보다 먼저 죽을까 두렵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슬픔을 계속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두렵다. 한 번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 같아 두렵다.



아내와 함께 혼주석에 앉아 아이들의 결혼식을 보고 싶다. 아이들이 각자 자기 가정을 꾸리고 그들과 닮은 자녀들을 키우는 걸 보고 싶다. 손자 손녀를 품에 안아보고 싶다. 손자 손녀에게 세뱃돈을 쥐어주고 싶다.



나의 아이들이 '아빠!'라는 호칭을 오래도록 부를 수 있도록 오래 살고 싶다. 엄습하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최대한 적게 후회하며 살고 싶다. 작은 아름다움에도 감탄하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살고 싶다. 어차피 다 이해할 수 없는 게 죽음이라면, 마음 한 켠에 자리를 내어주고 벗하며 살고 싶다. 모든 걸 끝장내는 죽음에게 담담하게 미소 지을 수 있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이들에게 나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따질 뿐이다. '왜 그러셨냐고' '이렇게까지 꼭 하셔야 했냐고'. 동시에 눈을 감고 간청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버티고 버틸 힘과 위로를 전해달라고. 슬픔과 눈물, 상실감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생의 의미를 찾게 해달라고, 조용히 기도할 뿐이다.


이전 10화 손빨래 단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