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란희 Oct 25. 2022

마음껏 울어라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기면 웃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기.

어른이 되고 나서 눈물이 멈출지 않아 꾸역꾸역 참아가며 겨우 달랬던 날이 있었습니다. 새로 생긴 도서관에서 엄마들이 모여 책 읽고 글 쓰는 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작가님을 초청해서 글쓰기 수업을 들었습니다. 수업 첫날 작가님은 질문을 통해 우리들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 듣고 난 후 ‘지금 이야기한 내용을 다음 시간에 글로 써오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글쓰기 과제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있었던 일들을 A4 반 분량으로 썼습니다. 일기 수준의 글이었지만 그렇게 쓰는 시도 자체가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의 시간에 각자 써온 글을 발표하듯이 읽어갔습니다. 거의 마지막에 제 차례였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 글을 읽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격한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다들 아이를 키우지만 똑같이 힘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별난 행동 같았습니다. 울면 서도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눈물을 멈추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눈물이 제 안에서 나오려고 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작가님은 울고 싶을 때는 그냥 울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습니다. 겨우 진정한 듯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미처 흘러나오지 못한 눈물이 머릿속에 가득 차있는 거 같았습니다. 머리가 멍해지고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왜 눈물을 멈추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진 것일까? 처음에는 제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강의 시간에 멈출 수 없었던 그 눈물에 대해서. 그 눈물은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차마 입으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아이에게 했던 내 말과 행동이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터져 나온 눈물이었습니다. 아이에게 더 이상 같은 잘못을 하고 싶지 않은데 고치지 못하는 저를 이해할 수 없어 힘든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책을 보고 교육을 들어서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는 있었습니다. 머리는 이해했습니다.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속까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고 있으니 제 모습을 바라보는 제 자신이 힘들었습니다. 


제 글을 보고 30년 인생 선배님은 초기 우울증 같다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아픈 상태였구나. 병명을 알고 나니 머릿속에 차 있던 눈물이 이제 됐다는 듯이 증발했습니다.     




노트북을 열고 한글 파일을 클릭해 아무것도 없는 흰 화면에 내가 잘못했던 행동들, 미안한 마음들 모두 꺼냈습니다. 눈물 콧물 닦아가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습니다. 축축한 휴지는 쌓여갔습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미안함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 썼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쓰지 못하면 한참을 울다가 다시 쓰기도 했습니다. 죄책감에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거침없이 마음껏 토해 냈습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들을 꺼내고 꺼내었습니다. 


글쓰기 과제에서는 한 줄로 밖에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내보냈습니다. 더 이상 쓸 말이 없을 때까지 썼습니다. 눈물이 멈출 때쯤 글도 같이 멈췄습니다. 나조차 알지 못해서 건드리지 못했던 시한폭탄을 제거한 느낌입니다. 눈물로 글로 저의 감정과 행동의 이유를 알게 되어 끊어낸 것입니다.      



    

감정의 외침이 밖으로 나가지 않길 바라며 글을 삭제했습니다. 몇 번을 쓰고 나니 처음처럼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힘든 육아를 했던 시기를 생각하면 아직 마음이 아픕니다.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서 수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잘 키우려고 했던 마음 대신 나를 잘 돌보려는 마음이 생기니 오히려 아이들과의 관계는 나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어린 첫째 아이와 어색했던 적이 있습니다. 단둘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몇 년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아이가 예쁩니다. 나의 초등학교 때 모습하고 너무 닮아 있는 아이. 곧 사춘기를 바라보며 훌쩍 커버린 아이에게 예쁘다는 소리가 마음에서 나옵니다.          




아이들 모습 중에서 유독 참기 힘든 행동이 우는 모습입니다. 우는 소리조차 듣기 싫고 모든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귀를 막고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그만 울라고만 했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기도 전에 우는소리에 이미 저의 감정은 날카롭게 날이 바짝 섰습니다.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고 참고만 있었던 어린아이가 내 안에 있었던 것일까. 어린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기억나지 않는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을까?’ 이제는 글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울고 싶으면 그냥 웁니다. 온 가족이 예능을 볼 때면 제가 가장 크게 웃습니다. 여전히 감정 표현이 서툴 지만 제 마음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울음소리도 조금씩 받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청소년을 상담하는 경찰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만은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중고생 아이들이 공부하다 늦게 들어오면 부모는 졸고 있더라도 기다리라고 합니다. 아이가 집 문을 열고 들어오면 두 팔을 들고 리액션을 하며 수고했다고 반겨주라는 것입니다. 


“리액션” 


마음을 표현하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집으로 옵니다. 아이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반가움을 끌어 모아 오버하듯이 두 팔을 들고 마주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환하게 웃습니다. 그 모습에 저의 목소리도 한층 더 올라갑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자꾸 해봐야 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울고 싶을 때는 울고,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하고, 즐거울 때는 마음껏 즐기고, 기쁠 때는 같이 웃고. 감정을 나누고 함께 할 때 서로의 관계가 돈독하게 어울리게 됩니다.


이전 10화 나는 자신에게 어떠한 실패를 허락할 수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