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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루시아 Jan 06. 2020

걱정이다! 엄마를 몰라보다니~

딸의 시간 5


2002년 8월 밀라노로 혼자 유학길에 올랐다. 이민가방을 챙겨 공항에 왔을 때만 해도 서류는 다 챙겼는지, 짐은 빠진 것이 없는지, 밤에 도착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인터넷 상으로만 연락하여 구한) '한국 유학생 집'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산만했다. 막상 비행기에 탑승하니 걱정과 슬픔의 눈으로 잘 다녀오라던 남편과 "엄마! 그럼 언제 와요?"라고 묻던 딸과 아무것도 모르고 돌봄 아주머니 품에 심드렁하게 안겨있던 아들이 눈앞에 와락 달려들었다. 두려운 맘과 먹먹한 맘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리움과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밤 9시경 밀라노에 도착해 삼단 이민가방을 기다렸으나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짐은 비행기를 갈아탄 프랑스 공항에 남겨졌단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짐을 기다리다, 짐의 향방을 알고, 짐의 처리방안을 논의하고, 12시가 다돼서 아파트에 도착했다. 우편함에 놓여있는 열쇠를 찾아 아파트 현관문에 도착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안도의 숨을 쉬고 열쇠를 돌렸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금도 유럽여행을 가면 그네들이 왜 열쇠를 서너 바퀴 돌려 문을 여는지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때의 당황이란, 10여분의 실랑이 끝에 칠흑 같은 아파트에 들어갔다. 그렇게 어둡고 쓸쓸하고 당황스럽게 나의 유학생활은 시작됐다.


낮에는 정규 수업을, 저녁은 만 25세 이상의 성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성인 무료 이탈리어 강습을, 수업 없는 금요일은 노트 정리와 과제 정리를, 토요일은 명품숍과 주변지역 탐색으로, 일요일은 밀라노에 하나뿐인 한인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정신없는 4개월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방학이라 불리는 2주간의 짧은 방학을 보내러 집에 오니 딸은 성큼 자라 와락 안겨 빛나는 눈으로 한참 내 얼굴을 봤다. "엄마! 보고 싶었어! 성탄절 보내러 왔지?" 하는 소란스러운 딸의 재잘거림에도 아들은 돌봄 아주머니 품에서 날 멀뚱이 쳐다봤다. 내가 "아들! 잘 지냈어? 이리 와 엄마야!" 했더니 아들은 나를 낯설어했다. "야! 엄마야! 그새 엄마를 잊어버렸어? 어쩌려고 엄마를 잊어버려!" 딸은 아들을 번쩍 안아 내 품에 안겨줬다. 두 돌을 앞둔 아들은 불안한 얼굴로 내 품을 벗어나고자 바둥거렸다. 내가 포근이 안고 "미안하다 아들! 벌써 다 잊어버린 건 아니지? 미안하다!" 하니 희미한 목소리의 익숙함 때문인지 날 빤히 쳐다봤다.  


그날, 딸과 아들을 데리고 함께 잔 후 아들은 기억을 소환한 듯 내게 안겨 밝은 미소와 분유 냄새를 풍기며 놀았다. 2주가 어찌 지났는지 모르게 지나갔고 난 밀라노에 도착하여 내 생에 다시없을 열정적인 공부를 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집엔 딸의 사랑 가득한 포옹과 "엄마야!" 하는 딸의 말에 아들은 내게 바로 안겼다. 두 아이는 일 년 동안 콩나물처럼 쑤욱 자라 있었다. 며칠 후 딸 방을 정리하며 딸의 그림일기를 읽었다. 딸은 나와 자기, 동생을 그려놓고는 일기를 썼다.


엄마가 왔다. 겨울방학이란다. 난 엄마가 와서 너무 좋다. 그런데 동생은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걱정이다. 엄마를 몰라보다니!

 


딸은 동생이 엄마를 몰라봤다는 사실에 걱정했다. 딸이 누굴 걱정할 나이도 아닌데, 그저 엄마가 와서 좋기만 하다고 말해도 될 나이인데, 남편은 내가 보여준 딸의 그림일기를 보곤 "나도 안 한 걱정을 아이가 했네"하며 딸의 그림일기를 한참 쳐다봤다.


딸이 일 년 동안 할머니와 함께 지내고 내가 유학 후 돌아와 우리 가족이 다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을 그즈음 딸이 물었다. "엄마! 할머니는 동생을 더 예뻐하는데, 엄마도 그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딸에게, "난 할머니는 잘 모르겠는데, 엄마는 먼저 태어난 아이는 엄마랑 더 많은 시간과 기억을 갖는데, 나중에 태어난 아이는 추억과 사랑할 시간이 더 적잖니. 그래서 어른들은 작은애를 더 아끼게 되는 게 아닐까? 언젠가 엄마가 죽으면 넌 일찍 태어난 만큼 엄마와 시간을 함께 했고 어찌 됐든 더 많은걸 기억하게 되잖아~ 그것만 생각하렴!"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고는, "그러게요. 동생은 엄마랑 아주 잠깐 떨어졌는데도 엄마를 다 잊어먹고, 맞아요! 난 엄마랑 늘 5년이나 더 함께 있죠." 했다.


유독 손자만을 예뻐하던 할머니와 지내는 동안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던 딸이 내게 묻는 질문에 나는 '남녀가 아닌 인간의 시간'으로 대답했고 딸은 만족해했다. 나의 첫 아이로 태어나 자신의 동생보다 긴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낸다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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