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가난
가난한 집 맏딸인 어린 덕희 눈에 집안 사정은 왜 그리 잘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눈에 보이는 엄마의 고단함은 덕희의 꿈을 꺾어버렸다. 덕희가 국민학교 6학년일 때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후 집을 나가 전국을 떠돌았고, 엄마는 빚쟁이의 독촉과 함께 다섯 남매를 홀로 키워야 했다. 엄마는 새벽마다 두부를 만들어 인근 가게에 팔고, 가발 공장을 다니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몇 년 후 엄마는 길가에 붙어 있던 작은 슬레이트 집에서 마른 국수를 국수 공장에서 떼와 두부, 청국장, 된장, 콩나물과 함께 팔았다. 가게라는 표시는 ‘잔치국수면, 손칼국수면 팔아요’라는 글씨뿐이었다. 엄마의 가게는 작았지만 바로 단골이 생겼다. 특히 칼국수 면은 입소문이 나 먼 동네 칼국수 집에서도 주문을 했고, 오전이면 모두 팔렸다. 장사가 제법 되자 엄마는 소면 기계를 들였다. 둥글고 얇은 소면을 3미터씩 길게 뽑아 집 안쪽 작은 마당에 빨래 널 듯 널곤, 소면이 바싹 마르면 작두로 가지런히 잘라 얇은 종이에 깔끔히 감싸 팔았다.
쌀밥보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장려하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혼자 일했고, 덕희는 그런 엄마를 시간 날 때마다 도왔다. 그런 엄마를 보며 대학이란 말은 목에 걸렸다. 이른 아침, 덕희가 등교 전 엄마를 도와 밥상을 차리고 단칸방에서 어린 동생들이 옹기종기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답답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덕희는 엄마와 상의도 없이 2개 뿐인 직업반에 들어갔다. 상의를 한들 뚜렷한 답이 없을 터였다. 덕희는 그때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입사했다.
은행 업무는 어렵지 않았다. 숫자를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누구보다 성실했고, 직장 상사가 맡기는 다양한 업무를 불평 없이 처리해 상사는 덕희를 챙겨줬다. 깍쟁이 같은 여직원들이 뒷말을 하든 말든 덕희는 사내 등산 모임, 탁구 모임 등 가리지 않고 나갔다. 밉상은 아니되, 그리 이쁘장한 얼굴도 아닌 덕에 덕희는 남자 사원들과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8년을 일하다 직장 상사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중소기업에서 대리로 근무하던 남편을 서울 종각 근처 다방에서 만났다. 30분 일찍 나가 남편이 들어오는 모습을 덕희는 지켜봤다. 키가 크고 수수한 차림새의 남편은 걸음걸이가 간결하고 진중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8년을 은행에서 근무하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본 덕희였다.
6개월을 만난 후 결혼하고는 맞벌이와 함께 덕희의 밥 짓기가 시작됐다. 아이를 낳기 전엔 그러려니 했었다. 한 달 산후조리를 마치고 다시 회사에 나갈 때도 아침 밥상을 차렸다. 뼈마디가 시렸다. 시골에 있는 엄마는 애 좀 키우고 다니지, 뭐 하러 그렇게 생고생이냐며 잔소리를 했지만, 결혼할 때 보탠 아파트 전세자금 일부와 동생들 학비 대출이 있으니 애를 낳았다고 놀 수는 없었다.
첫째는 5년 동안 시골 시부모 집에서 자랐다. 큰딸이 다섯 살 되던 해 둘째가 생겼고, 둘째 딸을 낳자 시어머니가 올라왔다. 손녀 둘을 돌보며 시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손자 타령을 했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온 후론 물도 제 손으로 따라 마시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려 일이 태산인데, 시어머니가 올라오자 남편은 아들로 돌아갔다.
셋째로 아들을 낳은 후 시골에 계시던 친정 엄마가 시골집을 정리하고 올라오셨다. 그때서야 덕희는 숨통이 트였다. 엄마는 서울에 올라와 외손주 셋을 돌보다 5년 전 돌아가셨다. 엄마는 젊어서는 덕희의 형제자매를 키우다, 늙어서는 덕희의 아이들을 키운 게 전부였다. 돌아가시기 전 요양원에 있던 엄마는 덕희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덕희 목소리를 듣고는 숨을 거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