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시옷 Oct 30. 2024

나는 여전히 내 딸이 부럽다.

90년대 방영된 드라마 <느낌>을 아시는지.

우희진은 요정 같았고, 요정을 애정하는 오빠들이 손지창, 김민종, 이정재 이렇게 셋이나 나왔다.

셋 다 친오빠처럼 요정을 챙겼다. (그중 진짜 친오빠도 있긴 했다) 그때부터 '오빠'라는 존재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살면서 그 욕망을 잊은 줄 알았더니,

내 딸에게 오빠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 흐뭇해하고 있다.

(현실과 드라마는 다르다고, 물론 잘 안다!)

내 딸은,

오빠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로봇 장난감을 조립할 줄 알았고, 요즘은 야구도 한다. 가끔 엄마 아빠가 화난 것 같을 때 오빠들과 똘똘 뭉쳐 위기를 해결해 간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 곧 위기인데 그걸 외롭지 않게 무사히 통과하는 것이다.

할미도 엄마(나)에겐 항시 화가 나 있는 듯 하지만

손녀에겐 한없이 약하고 다정 분이다. 애 몸무게가 20킬로가 넘었으니 이제 그만 좀 업으시라 해도, 손녀입이 삐죽삐죽해지면 '할미한테 업힐까?'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부러운 건,

자기 감정에 눈치 보지 않고 솔직다는 것이.

웃을 때 아주 크게 웃는다.

힘껏 웃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모른다.

웃지 않을 때는 운다.

우는 것도 남 눈치 보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슬퍼한다.

입이 시옷(ㅅ)이 되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만 웃어버린다.(네가 슬픈데 웃어서 미안해, 그런데 우는 모습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았고, 웃을 수 있는 순간은 너무 짧았고,

때로는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나로서는

그게 가장 부럽다.




내가 부러워한 사람들은 연예인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졌거나, 큰 부자이거나, 누구나 알아줄 만한 성공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부럽다'는 표현은 그냥 감탄사 같은 것.

그저 대화가 편안하게 잘 통하는 부모를 가진 사람이 부러웠다. 결핍 없는 집이, 사정없는 집이 어디 있겠냐만 어떤 말을 해도 수용하는 분위기와 '괜찮다'는 말 한마디가 오가는 집이 부러웠다.

살아보니 주변에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뿌리는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부모밑에서 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성장환경이 다를지언정 스스로 밝은,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고 싶었던 나는 늘 노오력이 따랐다.

엄마는 그런 노력조차 당신과 상관없이 여기는 사람이라

혼자 애쓰는 삶이 조금 지치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안정적인 직업과 가정을 꾸려 사는 게 부럽고,

나는 내 딸이 자기 자신으로 밝게 커 가는 게 부럽다.

아마 앞으로도 이 부러움은 계속되겠지만,

사랑하고 예뻐하는 마음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자세를 살짝 고쳐 앉으려 한다.

고쳐 앉은 자세에서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면 될 것 같다. 굳이 밝지 않아도, 주변에 나눠줄 에너지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