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5학년 4반 춘추전국시대

by MIRA

#03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오늘의 준비물은 책받침이다. 그리고, 300원을 담임선생님께 낸다.

80년대 극장에서는 영화 시작 전에 '대한 뉴스'가 항상 방영되었다. 정부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지, 이번 국경일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 국가 정책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그땐 그걸 보는 게 당연한 일이어서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대한 뉴스와 같은 맥락으로 학교에서는 반공영화 관람이 있었다.

장소는 과학실이다. 암막 커튼이 내려져 있어 불을 끄면 어둡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다. 수업을 안 하는 것만 좋고 나머지는 싫었다. 별로 재밌지도 않은 영화를 공짜도 아니고 돈을 내면서 봐야 하니 그냥 그랬다.


그날도 똑같았다. 반별로 줄을 서서 과학실로 입장을 한다. 책받침을 가져오지 않은 친구들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앞사람 등짝에 딱 붙어 앉아 천천히 돌아가는 영사기 소리를 들으면서 영화 관람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어떤 마을에 공산당이 쳐들어왔다. 마을 주민 중에는 반항하는 사람도 있고, 공산당 편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항상 반공영화에는 야리꾸리한 인물의 여성이 나왔는데, 역시나 오늘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촌스러운 무채색 계열 한복을 입고 있지만, 유독 한 여성만 빨간 한복을 입고 있다. 립스틱도 좀 바른 것 같은 느낌이다.


마을 사람들은 공산당을 몰아내기 위해서 비밀공간에서 몰래 계획을 세운다. 비밀공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볏단을 세워놓은 원뿔 같은 모양인데, 안쪽에는 넓은 공간이 있다는 얘기다. 말도 안 된다. 영화를 보면서도, 저 안에 저런 공간이 생길 수 없는데, 엉터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공산당에게 발각되어 볏단이 걷어지고 마을 사람들이 잡혀간다.


뒤 이어 나오는 장면은 빨간 한복을 입은 여성의 집에 갑자기 공산당 한 명이 침입한다.

여전히 영사기는 어둠을 뚫고 빛을 뿜으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하더니 갑자기 화면이 뿌옇게 바뀌었다.

'무슨 일이지? 아저씨가 필름을 잘못 가져오셨나?'


무척 흥미로웠던 장면도 아니고, 그저 공산당이 쳐들어 왔는데, 뿌연 화면 안의 빨간 한복을 입은 여성이 크게 소리를 지른다. 싸우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멱살을 잡는 것 같기도 하다.

결말은 기억이 안 난다. 어찌어찌해서 영화는 끝났다. 그런데, 문제는 교실로 돌아온 후에 일어났다.


남자 친구들이 자꾸 '키득키득' 웃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숙덕숙덕' 하면서 점점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점점 울그락불그락 해지더니 우리 반 전체를 향해 소리를 지르신다.

"야! 그래서 뭐, 옷고름을,,,,응? 그래서 뭐!!!!!!!!"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놓친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나? 남자 친구들은 무엇 때문에 수군대는 거지? 또 선생님은 뭐가 그리 화가 나셨지? 왜 얼굴이 점점 벌게지시면서 소리를 지르시는지......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영화를 본 것뿐인데 어째서 혼이 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날 키득키득 웃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기억은 난다. 크게 혼났던 그룹이 대충 누군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미풍양속을 저해할 수 있고, 지금의 우리는 건전한 중년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자세한 묘사는 여기까지만 한다.


내가 다시 그 영화를 보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 할 일 없이 놀고 있는데, 광복절이었던가? 하루 종일 TV에서 방송을 하길래, 이것저것 돌려서 보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다. 내가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던 원뿔 모양 볏단이 등장하고, 어김없이 사람들이 그 안에서 비밀회의를 하는 모습이었다.

'어? 나 저거 아는데......'

역시나 잊고 있었던 빨간 한복의 여성이 등장했다. 문제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뿌옇지가 않고, 멀쩡한 화면이다. 더구나 화면 속의 남녀는 멱살이 아니라 옷고름을 잡고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을 했다. 물론 집에 혼자 있었고, 스무 살도 넘었으니까 뭐 그리 어색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잉? 저렇게 끝나? 싱거운데?'

화면은 금세 돌아갔다. 빨간 한복의 여성은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 슬그머니 옆에 둔 것 같은 칼로 공산당을 찌른다. 그게 끝이다.


내가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살면서 느낀 적이 별로 없는데, 몇 년 전 상해에서 특이한 경험을 했다. 우리는 가족여행 중이었고, 그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문하기로 했다.

신천지 역에 내려서, 표지판을 따라 천천히 길을 걸어갔다. 좁고 후미진 곳이라 자칫 골목을 지나칠 수도 있었다. 표지판이 있어서 그렇지, 그냥 주택가일 뿐이다. 아침에 갓 세탁한 옷들이 골목 안쪽을 가득 메우고 만국기처럼 펄럭거린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점점 안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 나 좀 이상한 거 같아. 눈물이 나네"

남편과 YOON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너네 엄마가 우는 일이 많지 않은데......"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니, 안창호 선생께서 우리를 맞이하고 계셨다. 혼란의 시대에 이렇게 먼 타지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을 거라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났다.

YOON의 기부는 지금 시대의 반공영화

우리들의 시대는 그랬던 것 같다. 비좁은 과학실에 앉아 반공영화를 보고 매주 어린이회의 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다할 것을....영광을 다할 것을"

무슨 일인지, 행주반장이 자꾸 돌림노래처럼 말한다. 다음 구절이 생각나지 않는지, 제자리에서 자꾸 맴돌고 있다.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끝내 모두 웃음바다가 된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들이다. 나조차도 애국가는 야구장에서나 듣는 거라고 여겨진 지 오래였는데, 내 머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승복이 오빠의 작은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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