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자랑

5학년 4반 춘추전국시대

by MIRA

#02 학급 자랑

1985년 당시 우리 학교는 강릉에서 가장 최근에 개교한 학교였다.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몇 가지 특색 있는 사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어린이 방송국'이다.

교실마다 TV가 설치되어 있고, 어떤 친구들은 기자가 되어 뉴스를 취재하고, 어떤 친구들은 카메라맨이 되어 뉴스를 촬영하고, 어떤 친구들은 아나운서가 되어 직접 뉴스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아쉽게 나는 기자도 아나운서도 아니었지만, 그런 친구들이 있으니까 상관없었다.

그래서 운동장 조회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교실에서 편하게 아침방송으로 조회를 대신했다.

"승민슈퍼 앞에서 OOO 기자였습니다."


어린이방송국이라는 시스템에 걸맞게 새 학년에 올라가면 학급마다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학급자랑'이었다. 지금의 학예회와 비슷하며 내가 만약 선생님이었더라면, 1년 중에 가장 골치 아픈 일거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우리가 준비한 것은 리코더 합주였다.

연습 곡은 '역마차'.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영국 민요이며 모래바람을 흩날리며 유유히 달려가는 마차 한 대가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연주곡이다.

"레솔시레 미레시솔시, 레솔시라 시라솔미솔~"

선생님은 지휘봉을 저으며 박자를 맞추셨다. 사실 리코더는 음역대가 넓지 않아서 쉬어 보이는 악기로 인식될 수 있는데, 선생님은 어디서 이런 악보를 구하셨을까?

리코더로 나비야 같은 것만 불 수 있다는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으셨다.


여러 날에 걸쳐 연습을 했다. 분단을 나누어서 중간에 "(1분단)레미솔 솔미솔~(2분단)레미솔 솔미솔" 부분은 돌림으로 연주하고 뒷 부분"레-레레레레-도-시"에서 다시 합주가 되면서 살짝 느려지는데, 우리들이 박자를 잘 맞추지 못해서, 여러 번 혼이 난 기억이 있다.


두 번째로 준비한 것은 선생님께서 직접 쓰신 무언극이었다. 제목은 '엉터리 병원'. 주연배우에게 제목을 한 번 확인 후 글을 쓸까 하다가 그에게 흑역사일 수 있단 생각에 그냥 쓰기로 한다.


선생님은 촬영 전 날 김트루에게 다음 날 화장을 하고 오라고 하셨다. 김트루는 또렷한 이목구비에 달리기를 잘하던 친구였다. 가끔 여자애들보다 예쁘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고, 그 역할도 김트루가 딱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을 것이다.

촬영 당일 아침, 등굣길에 만난 김트루는 우리 엄마보다 더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등교하는 모든 어린이들이 김트루 얼굴을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김트루는 자기도 예쁘다고 생각했는지 전혀 창피해하지 않았다. 분홍 립스틱을 발랐음에도 불구하고 수업도 멀쩡하게 받고 점심도 야무지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제목 그대로 배경은 병원이다.

교실 앞 쪽 무대에는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고, 의사 가운을 입은 잉글랜드와 꽃단장을 한 김트루가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선생님께서 연습할 때는 웃어도 되지만, 촬영할 때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등이 굽은 환자 한 명이 진료실로 들어온다. 청진기를 든 잉글랜드가 이곳저곳을 진찰하더니, 김트루에게 무어라 말을 한다.

잠시 후 김트루는 커다란 뿅 망치를 들고 등장하고, 이를 본 환자가 놀라 발버둥 친다.

뿅 망치를 든 잉글랜드가 환자의 등을 박자에 맞춰 두드리기 시작한다. 뚝딱뚝딱 뚝딱뚝딱. 환자의 등을 크게 한 번 내리치는 순간, (김트루가 재빠르게 뒤쪽에서 핀으로 무언가를 콕 찌른다) 환자의 옷 속에 있던 풍선이 '빵'하고 터지더니, 갑자기 환자의 굽은 등이 곧게 펴진다.

셋은 서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이내 환자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진료실을 당당히 걸어 나간다.'


선생님은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셨을까? 지금이야 정보가 넘치는 시대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참으로 상상력이 풍부하고, 내가 경험한 몇 안 되는 시대를 비껴간 인물 중 한 분이시다.

물론, 이에 걸맞게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친 친구들도 대단하다. 환자 역할을 했던 친구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의사 연기를 한 잉글랜드는 정말 압권이었다.


잉글랜드는 방송부에서 카메라를 담당했다. 그 애가 직접 어떤 일을 하는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아침방송이 끝나고 나면 항상 뒷문을 열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잉글랜드는 몇 안 되는 남자 합창단원 중 하나였고, 어느 날, 우리들은 KBS 방송국에 뭔가를 녹음을 하러 갔다. 그 전에도 '누가누가 잘하나?' 뭐 이런 뽐내기 프로그램 때문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어 익숙했지만, 방송 준비가 덜 되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었다.


갑자기 잉글랜드가 한쪽에 있는 카메라를 보더니, 자연스럽게 다가가 걸려있는 헤드폰을 머리에 두르고 카메라를 돌려 각도를 맞추는 것이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처음부터 카메라는 내 것이었던 것처럼 자기가 아는 버튼을 톡톡 눌러 세팅을 하고,

'아, 이건 내 거랑 이렇게 다르구나' 뭐 그런 표정을 지었다. 순간 잉글랜드가 진짜 방송국 카메라맨처럼 멋있어 보였다.

한쪽에서 놀란 진짜 카메라맨 아저씨가 성급히 다가오셨다. 막상 아저씨는 잉글랜드의 능숙한 손놀림에 한번 더 놀라셨고, 엷은 미소를 지으셨다.


지금의 잉글랜드는 킴벌리 가문의 가업을 이어 또 다른 사장님이 되셨단다.

가끔 왜 이름이 잉글랜드인지, 그럼 동생은 아메리카 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너무 늦었으려나?

다음 동창회에서 만나게 되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