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MARI 기자

5학년 번외

by MIRA

"선생님, 그게 postmodern 인가요?"

고등학교 때 국민윤리 시간이다.

남규샘은 엄청 마르셨다. 허리띠를 했음에도 부족했는지 멜빵까지 했다. 귀여워 보이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건 진작에 안 지 오래다. 그 모습을 본 한 학생의 질문이다.


< postmodern >

건축, 미술, 디자인 분야에서 1981년경부터 유행한 사조. 현대와 과거의 상호보완적 표현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용어.

나는 대학에서 미술사 시간에 처음 배웠다.


Oh, MARI.

우리는 고2 때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다.

새 학기 첫 수업시간, 한 선생님께서 이 반 출석부는 인쇄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다.

42번 조MARI, 43번 조MIRA.

아마 세종대왕께서도 순서에 따라 A와 I가 크게 차이 날 거라는 생각은 못하셨을 것이다. 출석부에서 우리 둘은 오타로 보일 수 있다. 비슷한 듯 하지만, 전혀 다르고 전혀 다른 듯 하지만, 비슷한 그게 바로 우리 둘이다.


나는 언제부터 MARI가 내 사전에 들어왔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교회 초등부를 같이 다닌 것은 기억난다. 언제나 동생들과 함께라서 내 눈에는 MARI1, MARI2, MARI3 처럼 보였다. 그중 MARI2는 정작 MARI1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며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슨미와 나, 그리고 정원장도 자연스럽게 중등부에 올라갔다. 물론 정원장은 중간에 전학을 와서 합류했지만, 아버지가 장로님이셨기 때문에, 금세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MARI가 사라진 것이다.


얼마 후, 엄마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셨다. 본래 MARI네 부모님은 서로 종교가 달라서, 중학교에 들어가면, 아빠를 따라 성당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MARI어머니만 남으셨고, 나는 큰길에서 MARI를 볼 순 있지만, 교회에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신기했다. 종교의 자유는 청교도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자유의 대상자는 관점에 따라 좀 다르긴 하지만, 뭔가 앞 선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강릉을 관광도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전국에 몇 안 되는 비평준화 지역이었으며, 강릉을 대표하는 명문 남고와 여고가 존재하던 곳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교육도시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5만 원권에 나오는 신사임당은 어머니가 아니시며, 당당히 고향 선배님이신 것이다.


당연히 90년대 우리들의 시대는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이 의무였다. 야간 타율학습이라며, 불만이 나오기도 했지만, 여고에서 불평을 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중위권 이하라 큰 의미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야자가 너무 싫었다. 하루 종일 학교에 있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밖은 벌써 어두운데, 교실엔 빈자리 없이 친구들 등짝으로 가득하고 그 위를 비추는 형광등 불빛도 너무 싫었다.

그나마 내가 위안을 삼았던 것은 야자 시작 전 저녁시간이었다.


"MIRA엄마, 어디 가요?"

"아, 여고에 저녁 도시락 갖다 주러 가요~"

딸내미 저녁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소소하지만 정겨운 지역의 문화라 할 수 있겠다.

각자의 모녀들은 일종의 약속을 한다. 본관 앞 몇 번째 나무 아래에 엄마가 서있을 테니, 거기로 나오면 된다고.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니, 둘 만의 약속 장소를 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특이한 점은, 실제로 학교에서 나는 그 애와 친하지 않은데, 약속 장소와 시간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들끼리 친분을 쌓게 된다는 것이다. 정작 우리는 서로 모르는 데도 엄마들은 금세 가까운 사이가 되셨다.


오늘도 저녁시간이다. 나는 점심 도시락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가, 엄마의 저녁 도시락을 받아 교실로 돌아온다.

며칠 전부터 미술학원에 등록하여 미대에 진학하는 것으로 진로를 정했는데, 그래서인지 나의 발걸음은 전보다 몇 배는 더 가벼웠다.

나는 더 이상 야자를 하지 않고, 저녁을 먹고 가방을 챙겨 미술학원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 얼마나 설레고 즐거웠던 순간이었던가!


교실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하다.

우리 엄마는 갓 지은 밥을 꾹꾹 눌러 담고 계란 프라이를 하나 얹어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멸치볶음이 있고 그 옆에는 고추장볶음이 있어 밥에 계란과 비벼 먹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MARI 도시락은 뭔가 달라 보였다.


도시락 안에는 아기 주먹만 한 덩어리 몇 개가 들어 있다. 겉보기에는 귤껍질처럼 울퉁불퉁하지만 색깔은 감자와 비슷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기름이 발라져 있어서 반질반질하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

도시락 뚜껑을 열던 MARI는 싱글벙글이다. 오늘 밤 야자는 완전 잘될 것 같다는 얼굴을 하면서,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야금야금 베어먹는다. 도시락 안에는 작은 덩어리가 6개나 있는데도, 먹어보란 소리 한 번 안 한다. 그런 MARI를 우리는 구경만 했다. 궁금했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순간 어릴 적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던 노래 하나가 생각났다.

"순이 집에 갔더니......(기억 안 남)...... 안 주고, 우리 집에 와봐라, 수수팥떡 주나~봐라~."


아침방송 TV 속 장면은 영동 오락실 앞이다. 최근 어린이들이 오락에 빠져 오락실 출입이 잦다는 뉴스를 어린이 기자 한 명이 전하고 있다. 인터뷰에는 어린이 두 명이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은 여자 훈이 남동생이다.

"오락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꾸만 가고 싶어요."

뭐 이런 짜여진 각본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나는 훈이 남동생을 오락실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저 애가 오락이 뭔지는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영동 오락실 앞에서 (피식), 아......"

무슨 일인지 화면 속 기자가 마무리를 하다가 피식 웃어버린다. 그리고 이내, 바른 화면이 다시 등장한다.

"영동 오락실 앞에서 조MARI 기자였습니다."

누군가 귀찮아서 편집을 안 하고 NG 장면을 고스란히 내보낸 것이다. 방송을 보던 친구들은 뜻밖의 장면에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MARI도 인간이구나.'

20년 전 신촌발 일산행 심야 택시비를 몇 년 전 동창회에서 조작가 한정판 밥그릇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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