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시장에서 장보기, 그 달콤함

by 미스터 킴

한국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 모든 게, 회사 업무도, 유럽 여행도, 골프 대회도 무료해지던 시기였다.

해외생활 권태기가 온 것이다. 햇살이 가득한 브뤼셀의 찬란한 날씨에도 우울했다. 처음 왔을 때 호기심으로 열심히 업무를 배우고 개도국 출장을 다녔던 뜨거운 열정도 식어가고, 외국 친구들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웃음치며 인사하는 것도 어느덧 가식적인 억지웃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마음속 눈이 점점 삐뚤어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우승 이후 찾아온 골프 실력의 슬럼프는 어느덧 6개월을 훌쩍 넘어섰고, 잘 생긴 트로피에 이름을 새겨보겠다는 정복 의지도 사라졌다. 심지어 해외생활에 타성이 생기면서 ‘여행도 이제 그만 가자. 가까운 근교로 그냥 당일치기로 가자’라고 제안할 정도의 힘 빠진 날들이 오게 마련이다.


한국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한국 가족들이 와 줬으면 했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결국 가족 대신 고등학교 절친인 만호 가족이 온다 하여 쌍수를 들고 환영해 주었으며, 여행사 직원이 된 것처럼 3주 여행 일정을 베테랑같이 잡아줬다. 그 친구를 통해서나마 나의 먹먹한 가슴에 따뜻한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싱글인 홍콩 출신 동료 A가 브뤼셀에서 금, 토, 일요일에만 열리는 서민의 청과물/육류/생선류 시장인 들라쿠하 마켓(Market delacroix), 통칭 ‘아랍시장’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브뤼셀 미디 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손님과 장사꾼은 대부분 중동 및 아프리카계 사람들이다. 일찍이 그 시장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지만, 왠지 불결하고 물건 품질이 안 좋을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던, 관심 없던 곳.

바로 그 속칭 '아랍시장'.


그 친구 스티브가 말하길 ‘고기, 생선, 과일, 채소 등의 가격은 까르푸 같은 대형 마켓보다 20-40% 싸고, 잘 고르면 품질 좋은 것도 많다고 한다. 주차비도 시간당 1유로라 부담 없고 결정적으로 아내의 평소 가사 일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따로 시간 내지 않고 금요일 점심시간에 도시락이나 샌드위치를 빨리 먹고 1시간 동안 장을 보면 스트레스도 풀고 좋다는 것이다.

그의 제안이 무료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기에 동료 B를 설득시켜 합류시켰고, 총 3명이 추운 1월 초부터 금요일 점심시간마다 장을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마트나 홈플러스에서 아무 생각 없이 카트를 밀며 아내를 졸졸 쫓아다니기만 했었는데, 내가 주도적으로 혼자 장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해외에서....


아내가 준 구매 리스트 말고도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품목도 재량껏 샀다. 하지만, 앙골라 출신 B는 오로지 아내와 전화 통화를 통해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다소 꼭두각시적인 행태를 지속하곤 해서 내가 놀리곤 했다. 나는 실제로 주말에 한두 번씩 요리를 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일부 품목을 살 수 있었지만, B는 요리를 전혀 안 하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는 아직도 가부장적인 문화가 지배적이다.

금요일은 내가 차로 출근하는 날이라 내 차로 함께 출발했고, B가 고정적으로 1유로 주차비를 냈으며, A는 이 분야에 선임이라 주요 단골가게를 안내하였고, 과일 및 야채의 품질 심사 능력이 뛰어난 우리의 리더였다. 우리는 이렇게 화기애애한 팀워크로 장바구니 케리어에 1주 정도의 식량을 각자 확보했다.


처음 갔을 때 비록 춥고 우리가 스스로 초라해 보였지만, 시장의 모습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찬 삶의 현장 그 자체였다. 파는 사람은 목청을 높여 손님을 끌고, 사는 사람은 꼼꼼히 살펴 물건을 고르는 다이내믹한 거래 장터였다. 현금 거래만 되기 때문에 잔돈을 10센트까지 꼼꼼하게 챙겨주는 상인들 모습에서 신뢰감을 더해주었다. 손님은 주로 흑인이나 중동계 사람이며, 월 가계소득이 1,500유로 정도 되는 벨기에 이주민들이었다. 그들과 가까이서 같은 물건을 고르고 있으면 마음이 풋풋해지고, 어깨에 붙어 있는 미세한 가식이나 품위도 벗어던진 느낌이었다. 때로는 가끔 걷다가 길바닥에 2유로짜리 동전을 줍는 횡재수를 얻어 셋이서 낄낄거리곤 했다.


먼저 아랍시장의 가격은 분명히 쌌다. 고등어가 한국 식료품점에서는 진공 포장된 1마리에 5유로, 까르푸에서는 2마리에 4유로, 아랍시장은 4마리에 5유로였다. 본래 이 시장은 과거에 도살장이었기에 삼겹살, 목살, 소고기는 이보다 가격차가 더 컸으며, 애호박이나 귤 같은 채소, 과일도 확실히 저렴했다. 아랍시장에서 1주 평균 25유로를 소비하는데, 그동안 까르푸에서 같은 품목, 같은 양으로 40유로를 대략 쓴 것으로 계산됐다. 1주 차액이 15유로이니 한 달이면 60유로 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다. 나의 남은 6개월 벨기에 생활 기간 동안 아랍시장을 지속적으로 간다면 360유로(약 50만 원)를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렇게 내가 경제적인 동물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시점들이 종종 있으며, 절감되는 금액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한다. 마치 생각지 않은 보너스 용돈을 받은 것처럼.


둘째로, 시장은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운영하기에 우리가 가는 오후 1시쯤에는 품질이 전체적으로 약간 떨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대폭 가격을 할인해 막판 떨이를 하곤 한다. 하지만, 점포를 잘 고르면 오히려 그 가격에 더 싱싱한 품질의 청과물을 찾을 수 있다. 가끔 당도 낮은 사과를 사거나 오래된 당근을 사서 아내에게 핀잔이나 잔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좋은 품질이고 특히 고기류와 생선류는 정말 가족들이 백 프로 이상 만족했다.


셋째로, 야채, 과일 등 품목이 다양하다. 햇빛이 많고 당도가 높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산이 많고 아프리카산 열대 과일도 다양하게 있다. 또한, 한 시간 동안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몰랐던 식료품 지식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도 즐겁고 달콤하다. 육류와 생선류는 유리 냉장고에 전시해서 KG당 가격표를 붙여놓았기에 많은 대화도 할 필요 없이 간단하게 손가락 표시와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거래가 된다.


마지막으로, 금요일은 회사 분위기가 살짝 느슨해지는 분위기다. 따라서, 모두들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업무 강도도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또한, 연중 잡혀있는 수많은 다자간 회의도 금요일 이전에 대부분 종료한다. 이런 분위기의 금요일 점심시간에 시장을 보면 나 자신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나름 ‘우리만의 일탈 같은 화려한 외출’이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 가족의 1주 식생활을 위해 내가 가치 있는 노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하다. 금요일은 4시 30분 퇴근이다. 퇴근해서 무거운 장바구니를 싣고 집에 도착하면 아이들이 현관 앞으로 나와서 반겨준다. 금요일마다 아빠가 두 손 가득 장을 보고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말 동안 식사 메뉴가 풍성해져 가족들의 행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나는 그렇게 6개월간 매주 금요일마다 남자 셋이서 소탈하게 아랍시장을 방문했다. 비 오는 날도, 맑은 날도, 눈 오는 날도 똑같이 재미있었다. 날씨와 상관없이 우리는 아랍시장의 활기찬 매력을 듬뿍 공유했고, 식생활과 농축산업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했다. 예전에 전혀 느껴보지 못한 '쇼핑의 달콤함'이라고 해야 하나. 중년이라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런지 장보기는 결코 지겨운 일이 아니었다. 나로 인해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재료가 제공된다는 희열과 아내의 시간을 덜어주는 공동 가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 절약에서 오는 뿌듯함과 가사 노동의 소중한 가치는 잊지 않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실천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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