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요리를 하는 이유

15주년 결혼기념일의 스쳐가는 사색

by 미스터 킴

오늘은 아내와 결혼 15주년이 되는 날이다. 집 앞에 있는 꽃집에 전화를 걸어 미리 꽃다발을 예약하고, 퇴근할 때 찾아가기로 했다. 보라색, 빨간색, 분홍색 이 세 가지의 색깔을 콘셉트로 해달라고 했더니 센스 있으시다는 답변이 왔다. 아내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언젠가부터 아내가 기념일에 대한 감이 떨어져 서글프다. 어쨌든 난 마음속으로 내가 스스로 대견하다고 쓰다듬어주고 나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난 왜 한국에 돌아와서 요리를 안 할까?'


'즉, 난 왜 벨기에에 있었을 때 요리를 시작했을까?'


나름 분석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1. 내가 어쩌다 요리에 빠졌을까?


우리는 벨기에 도착 전, 전임자에게서 몇 가지 가구와 인테리어 용품을 싸게 인수받기로 했다. 그중에 하나가 8인용 식탁이었다. 한국에서는 4인용 식탁이 표준이지만, 벨기에에는 6인 또는 8인용 식탁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다른 이웃 가족이나 아이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는 경우도 많고, 한국 가족이나 지인이 방문할 때 유용하다는 점, 그리고 아이들 공부 책상용으로도 제격이기 때문이다.


막상 처음 왔을 때, 이삿짐이 도착하기 전에는 반찬이 계란 프라이, 김치, 통조림 깻잎 등 두세 가지 정도로 빈약해서 큰 식탁 대비 밥상이 너무 초라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큰 식탁을 괜히 샀다며 투덜대곤 했다.


6개월쯤 지났을 즈음, 토요일 아침 무심코 열어본 냉장고를 보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양한 식료품 부자재가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보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요리를 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햄, 버터, 캔참치 등이 일부 남아 있었고, 파, 당근, 호박, 양배추, 감자 등의 야채도 신선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버려야 할 야채나 과일도 보여 인상이 찌푸러졌다.

그렇게 해서 그날 아침상으로 차린 정갈한 볶음밥은 주말 아침을 빛내기에 충분했다.



2. 백종원 아저씨와 만개의 레시피가 가사노동 분담으로...


남자가 요리에 자신감을 갖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백종원 아저씨 덕분이다. 요리를 남성과도 친근하게 느끼게 해 줬을 뿐 아니라, 식사한 사람의 표정이나 칭찬을 듣고 남성 요리사는 뿌듯해지기 때문이다.


사실상 벨기에는 인건비가 매우 비싸서 외식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가끔 벨기에식 홍합 요리나 스페인식 빠에야나 해산물 요리로 기분을 낼 때가 있지만, 자주 외식을 하면 여지없이 월급 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요리를 하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되고, 가족들의 신임도 받는 일거양득인 셈이다. 특히 아내가 내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날에는 여지없이 내가 그날 요리를 하는 바터가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또한, 만개의 레시피라는 앱은 요리할 때 매우 유용했다. 모든 메뉴가 망라되어 있어 재료만 있으면 거의 다 도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도전해서 검증된 몇 가지 메뉴를 제시한다면 30여 가지 정도 된다. 다만, 평일에는 퇴근하고 늦게 집에 돌아오기에 저녁을 차릴 여지가 없었지만, 가끔 아이들을 위한 간식이나 야식도 시도하곤 했다.



3. 손님을 초대하면 기쁨이 배가된다.


처음에는 주로 한국 사람인 지인들에게서 초대를 받았다. 초기 정착 시 필요한 정보도 듣고, 에피소드나 유의사항도 듣는 유익한 자리였다. 무엇보다도 벨기에에서 먹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한식 요리를 대접받을 때에는 더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즐거운 음악 속에서 아이들도 과식하고 함께 뛰어노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요리에 자신이 생겼을 때 다른 한인 가족들을 집에 초대했고, 앞치마를 두르고 서빙하는 내 모습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러웠다. 특히, 부모님이 방문하셨을 때 엄마가 날 신기하게 쳐다봤었다. 내가 어렸을 적 많은 것을 챙겨주셨던 엄마는 큰 아들인 내가 부엌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색했을 텐데.... 앞치마를 두르고 야채를 써는 모습, 프라이팬 앞에서 간을 보는 모습, 다양한 조미료로 양념장을 만드는 모습. 엄마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식사를 마칠 때쯤이면 커피나 벨기에 맥주, 그리고 모양을 낸 예쁜 안주거리까지 과시하는 마음. 아마도 요리사는 그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4. 장보기와 요리는 같이 하면 더 좋다.


주말 아침에는 골프를 치러 가는 것이 정규적인 나의 스케줄이었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겨울에는 여지없이 아침에 난 주방으로 간다. 시간이 부족할 때에는 죽이나 누룽지를 하기도 하고, 토스트나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아랍시장에서 금요일에 장을 보고 온 신선한 재료가 있었기에 풍미 있는 음식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벨기에에서는 토요일 아침에 빵집을 가면 잘 차려입은 노신사들이 줄지어 바게트 빵과 크루아상을 사 간다. 그만큼 주말 아침의 신선한 빵을 사는 노인들의 깔끔한 차림새는 이 나라의 오래된 전통이라고 한다. 난 처음에 슬리퍼를 신고 부스스한 눈을 비비고 모자를 눌러쓰고 갔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부터 아침상을 차릴 때 정숙하게 옷을 차려입기도 했다.


그리고 날씨가 좋은 때에는 바비큐 파티를 했다. 돼지고기와 스테이크용 비프가 비싸지 않을뿐더러 불을 피우는 도구와 조개탄도 구하기가 쉽다. 이때 와인과 5도씨 온도의 맥주를 곁들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하겠다.


한국에 돌아온지도 벌써 두 달.

난 왜 요리를 잊어버렸을까? 영어 잊어버리는 속도만큼 요리가 잊히고 있다. 아니, 아예 요리를 하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비록 근무지가 서울이라 주말부부를 하고 있는 물리적 이유가 제일 크다 하겠지만, 주말에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좋아했던, 한참 꽂혀 있었던 즐거운 요리였는데, 지금은 '내가 그때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하다.


그래서 난 오늘 저녁 '표고버섯 소고기 전골'을 오랜만에 해 보려고 한다. 특별한 날, 우리 부부의 15주년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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