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목표가 없지만
학기 초가 되면 학교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런 결정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조사한다. 희망 직업을 적는다고 그대로 돼야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작성 기한이 정해진 일이니 아이들에겐 부담되는 과제가 된다.
서우의 깊은 한숨에 책장이 넘어간다.
기록으로 남기 때문인지, 미래를 꿈꾸는 일만은 소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해마다 하는 일인데도, 조사서 한 장이 그렇게나 무겁다.
머리 싸맨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실은 그럴 만도 한 것이, 빈칸에 적히는 단어에 의해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 시기에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시선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직업에 따라 더 잘해야 하는 공부가 생겨나고, 선택과목도 확정되고, 교과목들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었다. 학교 생활 전반에 아직 명확하지도 않은 꿈을 따라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제출한 기록은 적어도 한 한기, 한 학년 안에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학생의 입장에서 변화의 여지까지 고민해야 하는 일이고 만다. 번역가가 되고 싶어 수학을 잠시 미뤄두고 영어 국어에 매진했는데, 계절을 지나면서 번역 로봇이 만들고 싶어 져서 수학을 미룬 것을 되돌릴 수 없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게 된다. 아이들의 눈앞의 놓인 희망 직업 조사서는, 그 빈칸을 채우는 일은 대단한 미션이 맞다.
서우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거짓으로 채워 넘기지는 못했다.
“전문직을 적어내면 성적 압박이, 아이돌 연예인 아티스트라 쓴다면 재능과 ° 외모 공격이 들어올 거예요.”
귀로 들은 직업들은 많았지만 그중 하나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란 만만치 않다. 정말 하고 싶은 걸 찾으려면, 그 정도의 확신을 가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꿈도 희망도 없는 자기 자신이 이 미션의 가장 힘든 요인이 돼버렸다.
그즈음 우리는 병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빠져있었다. 생각이 온통 조사서에 가 있어 수업을 할 수 없으니, 그만 털어내자고 던져본 말이었다.
의사여서는 안 되는 뜻밖의 긴 이유. 서우가 의사를 희망 직업으로 정하지 않는 이유들을 듣는 게 좋았다. 수학을 못해서, 공부를 못해서 안돼요, 하고 쳐내지 않았다. 드라마에 흠뻑 빠져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의사가 하는 일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생각해본 모양이었다. 자신을 비춰보기도 했고.
꿈, 희망, 목표 같은 말들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새해가 되면 목표를 세우고, 실천의 의지를 다진다. 꿈이 있는 동안 미래에는 빛이 있고, 가느다란 희망을 지키기 위해 삶은 꽤 부지런해진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수많은 꿈과 희망 직업들이 마음속에 생겨난다. 일부는 이루기도 또 일부는 그렇지 않기도 한데, 어렸을 때와 다른 점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그 꿈이, 희망이, 목표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소망하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그리는 건 어쩌면 살아있기에 이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이들에게 그런 말은 쉽게 닿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목표가 확실한 또래가 부러울 뿐이다.
아이들의 주변에는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하고, 진로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또래가 한 명씩은 있다. 희망 직업 조사서 정도는 그 자리에서 채워 제출한다. 목표가 분명하니 일 년 치 공부계획도 세워두었거나, 이미 정해진 길로 들어선 지 한참이기도 하다. 그 아이의 진로 고민이 남달리 오래전에 시작되었는지, 누군가 그러라고 정해준 것인지, 날 때부터 단 하나의 꿈이 굳건했는지 가려진 사정을 알 수 없음에도, 조사서의 빈칸을 바라보며 고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
그리고 덕분에 수면 위로 바짝 떠오르는 진지한 고민은 자신은 아직도 하고 싶은 게 "없다"는데 이른다. 그저 아직, 바라는 바가 구체적이지 않을 뿐인데 아이들은 이를 문제적 상태로 인식하고 괴로워한다. 누구는 이미 정했는데 본인은 아직이라니, 가진 것이라고는 무능과 무기력밖에 없다느니 하면서. 의미 없는 삶이 가진 미래는 더욱 아득해진다. 이리 흔들리고 저리 나풀거리며 아이들의 마음은 갈피를 못 잡는다.
교육부 발행 자료 (2021 학교 생활 기록부 기재요령 - 중학교, 고등학교)에 따르면 희망 직업과 관련한 사항은 상급학교 진학 시 전형 자료로 제공하지 않는다. 관련한 내용을 특기 사항에 기록하지만, 구체적인 직업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을 조사하던 양식은 개정되었고, 희망 진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기록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구체적인 직업을 서둘러 결정하고, 기록한 뒤 지켜내야만 하는 절대적인 조사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걸 써내라는 이유는 아마도 학생들이 목표를 정하고, 활기찬 일상의 계기를 제공하고자 함일 것이다. 학생과 학생의 꿈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학기초 희망 직업 조사가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키우고, 그들이 여러 직업군을 돌아보며 세상을 배워가는 도구로 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니 과제하는 심정으로 꾹꾹 눌러 써넣은 한 두 단어에 아이들의 한 학기가, 일 년이 붙들리지 않는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희망 직업은 달라져도 괜찮은 것이고, 고민하는 중에 실컷 바꿔볼 수 있다면, 오히려 희망적이다.
관심 없다더니, 교사에 대한 고민도 한 것이다. 그런데, 공무원이라니, 주변의 간섭과 참견이 더 길어질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이만큼의 고민이라면 올해 조사서 덕분에 서우는 많이도 자랐을 것이다.
누구나 바라고 소원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나, 그것이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것, 혹은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것을 발견하고, 잠 못 이루는 시간을 꿈꾸며 기다린다.
모두에게 한 날 한시에 찾아올 리 없지 않은가. 희망 직업 조사서를 정해진 기한 내에 적어내기 어려운 건 당연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소중한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진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탐색과 고민이 시작되고, 조언과 도움을 얻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갈무리하고 다짐하는 데까지 이르는, 저마다의 때가 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기록해두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서두르다가 진짜 마음을 보지 못할까, 고민의 여지마저 얻지 못할까, 직업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의 가치를 가벼이 넘길까, 그 모든 절차를 어차피 상관없는 귀찮은 과정으로 치워버리고 말까, 더 아쉽고 안타까운 상황은 이런 것들이다.
구르는 낙엽에도 웃고, 우연히 읽게 된 한 문장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시절이니 하루하루 살면서 마음에 맺히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거울에 비추듯, 자신의 모습을 비출 기회가 많아지길, 제게 가장 잘 맞는 것들을 발견하길 바란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지금'은 실은 '무한한 가능성'의 또 다른 말이니까.
2년쯤 지나, 꿈이자 이루고 싶은 목표이며 누가 봐도 멋진 희망 직업이 서우에게 생겼다. 태어나서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자격 조건이 꽤나 엄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서우는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응원한다.
언제든 달라져도 괜찮다는 말도 끼워넣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