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읽어보세요

손에 든 책

by 이룬

고등 영어 수업에서 보이는, 이미 오래된 어려움은 이런 것이다.


"우리말로 읽고 나니 더 모르겠어요."


실소가 터져 나오는 이 말은 십수 년 전부터 변함없다.

영어 수업의 텍스트는 다양한 분야의 낯선 주제를 다룬다. 외워둔 단어를 꺼내, 어렵게 갈고닦은 문법 실력으로, 처음 보는 텍스트를 한 문장씩 해석한다. 더듬거리며 내용을 해석하고 해당 문제까지 풀면 진도는 끝난다. 단어 반복도 하고, 문법 복습도 하고, 다양한 글을 접하니 상식과 잡식이 풍부한 꽤나 지적인 인간이 될 것 같아 뿌듯하다.

그러다 한 번씩, 텍스트의 주제가 사회적인 이슈와 닿아있거나, 다른 과목 와의 연계가 필요할 때, 외국어 학습으로서의 과정을 마친 뒤, 수업 내용을 확장한다. 시간 절약을 위해 해설지의 우리말 해석본을 텍스트 삼기도 하는데, 직전까지 수업을 잘하던 학생들도 처음인양 당황하곤 한다. 우리말을 읽고 나니 더 모르겠다는 것이다.

단어와 문법, 구문 등의 학습 정보를 이용해 해석하는 것은 기능적인 일이다. 훈련과 연습으로 패턴을 익힘으로 해결 가능한 일이다. 물론 성적을 내기 위해 기능적 풀이 과정 자체가 학습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다만 그를 넘어서, 깊이 이해하려 들면 아이들마다의 차이가 드러난다. 낯선 사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기존의 배경 지식을 통해 스스로 이해를 확장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직접 해석한 문장임에도 필자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차이가 후에 등급을 가른다.


"제가 고른 답도 말은 되지 않나요?"


교과목 영어는, 어휘장이 넓다면 문법이 약해도 평균 이상의 독해 풀이가 가능하고, 문제집을 수십 권 풀어내 학습량이 많다면 문제 풀이 감각이 향상되어 해석이 완벽하지 않다 해도 기술적으로 정답을 찾아낼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공부를 많이 해두면, 찍기에도 실력이 발휘되는 것처럼 원하는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로 된 글을 잘 해석하는 것과 하나의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다른 차원의 배움이다.


그리고 그 차원을 가르는 일은 독서 경험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낯선 문제에 노출되는 순간은 모든 학생에게 동일하다. 주어진 정보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새 문제를 익숙한 영역으로 빠르게 끌고 와 해결하는 과정은 저마다 달랐던 책 읽기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


독서, 책 읽기는 한 권의 책을 펼쳐,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이해하고 사건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 끝내 결말에 이르는 기억과 이해를 총동원하는 지적 활동이다. 모르는 단어나 문장이 나왔을 때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눈이 책 위를 지난다고 그 일이 되는 게 아니다.

입시의 끝에서 1등급을 얻으려면 지금부터 책을 읽어야 한다고, 초등학교 3학년에게 말해봤자 반대편 귀로 흘러나갈 것이다. 고등학교 가면 책 읽을 시간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추천 도서를 읽어두자고 중학교 2학년에게 말한다면... 그들이 끝까지 들어줄지 모르겠고, 이미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밥 먹고 잠자듯, 일상의 일부가 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 그리할지가 고민인 것이다.


아이들의 책 읽기는 그림책으로 시작해, 얇은 글그림 동화를 거쳐, 중장 편의 창작으로 넘어간다. 운이 좋으면 틈틈이 학습 만화 탐독 시기도 지나고, 보호자 몰래 황당 시리즈물의 재미에 빠지기도 한다.

문학은 서사의 힘으로 긴 이야기와 함께 호흡하며 인물들과의 공감을 통해 풍부한 정서적 경험을 하는 재미를 준다. 아이들이 오래 남아 즐기는 이유다. 장편으로 넘어갈 즈음, 고학년이 될 무렵이면 사회 인문 역사 과학 분야 그러니까 비문학이라 통칭되는 영역의 책을 권유받기 시작한다. 오히려 문학보다 좋아할 수도 있다. 비문학 영역의 글이 주는 새로운 정보들에 눈이 뜨이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싫은 것이 분명 해지는 시기가 되면서, 본인의 흥미와 멀리 있는 책 추천은 또 다른 공부가 추가되는 것과 다름없어진다. 도서관에 와서 책 아닌 다른 것들을 잡고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억지로 무언가를 읽히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저 책장을 규칙적으로 넘기는 것이 아닌, 읽고 이해하길 바란다면 손에 들린 책을 그대로 두길 바란다. 흥미가 있다는 사실을 격려하고 응원하길 바란다. 밀려나지 않은 책들만이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아이들 곁에 남는 책이 될 수이다.


책 속의 이야기를, 정보를, 새로운 세계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즐겁다면 독서 편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글을 읽으며, 멋진 문장 사이를 걷는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 안다. 다. 그리고 결국, 즐거운 독서가 자연스럽게 글을 읽는 힘, 글의 길이에 연연하지 않는 힘, 글을 읽으며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키운다. 독서 편식이 깊어지면 전문가가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확장이 일어나면 다양한 독서도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독서는 늘 강조되어온 덕분에 소중한 덕목으로 여겨지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모두가 하지 않는다. 쉽게 다뤄지고 툭하면 미뤄진다. 게다가 지극히 개인적인 시공간에서 누려지기 때문에 자발적 의지가 우선 조건이다. 그러니 책 읽기는 무엇보다 흥미롭고 재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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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언제나 '요즘 읽는 책'이 있는 학생이었다.

입시생의 삶이 바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설정이 있는 소설이 재밌고, 남들이 재밌다고 하는 책보다는 본인이 재미있게 읽은 책을 징검다리 삼고, 최신 개정판보다 이전에 나온 초판을, 매끈한 양장보다는 거친 질감의 페이퍼백을 선호하는, 책에 대한 관심이 다양하고 자신만의 독서 취향이 있는 지수였다.


"저 책은 무슨 책이에요?"

"철학 입문서."


지수는 늘 책장에 관심이 많았다. 여러 번 그 앞을 서성이기만 하더니 어느 날 <소피의 세계>를 자신이 읽을 수 있는지 물어왔다. 세상에 누군가 읽을 수 없는 책은 없다. 선택했다면 읽을 수 있다. 취향이 확고한 독자의 관심이 책의 내용 아닌 표지에서 시작했다 한들 모처럼 말을 꺼냈으니 빌려주었다. 묵직한 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품에 안고 나서는 지수에게, 내용이 낯설면 하루에 한 챕터만 읽는 것도 좋겠다고 귀띔했다. 그 책의 즐거움은 챕터와 챕터 사이에 있다는 것도.

다음 시간에 지수는 두 권의 <소피의 세계>를 들고 왔다. 하루에 한 챕터, 아끼며 오래 읽고 싶을 것 같아 주문했다고. 무겁지만 바뀐 표지를 자랑하러 두 권을 다 들고 온 것이었다.


학생들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일부러 책을 권하지 않는다. 책 이야기를 할 만한 실마리를 매의 눈으로 노리지만, 독서 경험이 부족한 것보다 책 읽기가 싫은 일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므로 말을 아끼는 편이다. 빌려주었다한들 잘 읽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지수가 그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도 궁금하지만 모른다.



"쌤. 비문학 책이요. 이게 나름 재미가 있더라고요. 정말 새로운 걸 알게 되는 재미랄까? 정보가 많아지면서 똑똑해지고. 소설 아닌 책을 읽게 될 줄 몰랐는데, 재미있어요."


며칠이 지났을 까, 천문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며 지수가 말했다. 그리고 의외의 즐거움을 알게 된 낯선 시도의 시작이 <소피의 세계>였다는 고마운 말도. 지수는 중2의 여름을 지나는 중이었다.



어른의 책 읽기는 취미가 되고, 선택도 가능하다.

좋으면 하고, 별로면 안 하면 그만이다. 그런 선택권을 꼭 쥔 어른들이 책을 읽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 한다. 물론 보호자들 수고도 많다. 도서관이며 서점을 함께 다니거나, 어린이가 책에 관심을 보이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우리 모두는 독서의 이로움을 평생 들어왔고, 잘 알기에, 소중한 아이들의 삶에 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역시 어떤 책을 고를지에서부터 책을 읽을지 말지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에 손에 달린 선택이다. 어른이 될 아이들이기에. 자신의 흥미를 따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추천 도서 목록이 가진 교훈보다 오래가는 힘을 줄 것이다.


이과 계열 학생이 과학 서적 아닌 소설을 읽어 유감인가, 허구의 세계에서 더 큰 우주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유독 단편만 읽는 아이가 긴 글을 읽지 못할까 걱정인가, 함축과 생략 그리고 한 방의 매력에 빠진 중일 것이다. 문학 교과에 출제되는 고전이 먼저, 베스트셀러는 이다음에 대학 가서 읽어야 하는가, 그때는 또 다른 책이 나올 텐데?!


지금 아이가 무언가를 읽고 있다면, 책 읽기가 분명하다.

읽고, 마음에 둔다면, 세계를 품는 것이다. 교재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다는 문제에 빠지고, 답과 답이 아닌 것을 가려내고, 필자의 의도뿐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마저 파악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풀어내야 할 수많은 문제를 바로 읽어내기 위해, 우선은 즐겨 읽을 수 있길 바란다.


책 읽기는 선행을 위해 하는 학습이 아니지만, 책을 계속 읽어온 사람이 쌓은 시간은 쉽게 앞지를 수 없다.

아이들이 아이일 때부터 재밌게 읽는다면, 자연스럽게 그리 될 것이다. 이토록 단출한 문장이 거대한 힘을 내는 것이 언제나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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