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파도가 치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by blue

월간 채널예스 에세이 공모전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비법)

제목: <머리에 파도가 치는 여자가 되고싶어요>

글쓴이: 팅팅


스트레스는 현대인의 주요한 적이다. 특히 현대한국인은 생애주기별로 스트레스를 달고 산다. 입시 스트레스, 취업 스트레스, 결혼 스트레스, 육아 스트레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간상에 미달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낙인 찍힐까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어떤 프레임 안의 ‘보통 인간’이 되기 위해 모두가 발버둥친다. 나도 한때 ‘보통 인간’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대중 매체도 보통의 존재들을 강조했다. 드라마 <미생> 에서는 비정규직 청년이 정규직이 되려고 성심을 다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그 드라마를 재밌게 봤고, 좋아했었다. 밥벌이는 위대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 – 그리고 보통 인간들의 특별함을 가슴 깊이 느꼈다. 대학생때부터 백수 시절, 그리고 계약직으로 직장을 다녔던 시기 모두 나는 평범해지고 싶었었다. 보통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은 건강하거나 혹은 해로운 스트레스로 작동하여, 내가 인간구실을 하게 하는 데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난 회사원 체질이 아닌 것 같아”라는 말을 들으면, “누군 안 그래?” 하며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정말 다른 일의 세계로 전향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다. 나는 언젠가부터 커피 내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까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바리스타 자리가 쉽게 나지 않을 때는 커피 머신기가 있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 육체노동의 세계는 고단했지만 뿌듯했다. 테이블을 쓸고 닦고, 커피를 내리고, 컵들을 닦고,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친절한 미소로 감정노동도 곁들이고. 그리고 나는 종종 글을 썼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글을 쓰는 나 자신에 나르시즘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럴 때는 지났다. 다만 나의 조그만 선택들로 달라진 일상들에서, 스트레스의 양과 질이 변한 것 같다. 무엇보다 보통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다.

나는 세계에 대해서도 쓰고 싶은데, 우선 내 세계에 대해 많이 썼다. 내 일상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많이 읽으려고 했다. 내가 원고를 투고한 잡지들은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었다. 특히 잡지 <좋은 생각>이 그렇다. 이 작고 귀여운 잡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밝고 따뜻한 이야기들을 싣는다. 그런데, 나는 <좋은 생각>의 한 글을 보고 가슴이 두근두근 대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일하던 내 또래의 여성직장인이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파랑머리로 염색한 일화가 특집으로 실렸었다. 그녀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뭔가로부터 해방감을 느꼈고, 자유로워 졌고,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고, 발리에서 남자친구도 만났다고 썼다. 나는 글을 읽으며 내내 가슴이 콩닥거렸고, 글에 삽입된 그녀의 뒷모습-푸르른 긴 머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본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만, 나는 왠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글을 잊어가고 있었다. 볕좋은 날 서울에서 친구를 만났다. 친구와 요즘 읽는 책을 이야기 하는데, 친구가 꺼낸 책은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그 책을 펼쳐보다가 한 사진에 가슴이 폭발할 뻔했다. 거리에서 찍은 한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길고 탐스러운 파랑 머리. 그래, 이거였지,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원하는 거.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염색이란 수많은 성취들에 비교했을 때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 하지만 염색은 내 일상을 변하게 해줄 완벽한 방법 같이 보였다. 상쾌한 기분전환인 동시에 내가 원하는 내 모습에 가까워지는 거. 혹은 원래의 내 모습을 찾아가는 것. 남들이 나를 특이하다고 놀려도 나는 상관없었다. 어짜피 내 안의 평범함을 나는 잘 인지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염색은 대수지만 대수가 아니기도 하다. 특이함과 평범함을 가르는 경계란 얼마나 모호한지! 나는 여름이 오면 파랑 머리로 염색을 할 작정이다.

레스토랑 일을 끝내고 퇴근 하던 길에 버스장류장에서 듣던 박재범의 노래 “요트”가 떠오른다. “샴페인 한 병 터뜨리고 너의 스트레스와 피로 해소해/ 투명한 바닷가에 빠지고 싶어/ 무인도로 떠나자 딴 거 필요없어/ 네 머릿결엔 파도가 치고 있어/ 햇살은 따뜻하게” 너무 청량한 노래였다. 이 노래 속 여자처럼 경쾌하고 청량한 여자가 되고 싶단 생각을 했다. 물론 <좋은 생각>에 글을 쓴 여자처럼 먼저 나 자신의 기분전환을 위해 염색을 하는 거지만, 아직 낭만을 버리지 못한 나는 내 파랑 머리를 보고 앞의 노래가사처럼 나와 사랑에 빠질 누군가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스트레스가 풀려버리는 느낌이다. 여름이 되면, 바다의 파도 같은 머리색을 할 거다. 그렇게 특별한 나로서 천국같은 여름을 살아보고 싶다. 내가 접했던 잡지의 글과 책의 사진과 노랫말들이 그렇게 점지해주고 있다.

keyword
이전 09화호캉스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