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코 베지테리안 pesco-vegetarians?"
"그게 먼데?"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눈 지 벌써 몇 년 되었다. 그녀는 정말 실행에 옮겼다. 아침이면 양배추를, 그것도 비싸다는 유기농으로 홀푸드 마켓 것만 고집해, 썩썩 갈아 식탁에 올려놓고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페스코를 선언한 그녀가 야속했다. 나는 육식주의자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만 채식을 좋아했던 우리 형제는 그 없던 시절에도 고기를 질겅질겅 처먹으며 자랐다. 우리 아이들도 미국의 야채보다 저렴한 고기를 꾸역꾸역 먹여 키워 덩치는 버펄로 만하고 얼굴은 곰 같이 성장했다.
식탁을 저 푸른 초원으로 만들었군
그녀는 나의 푸념에도 아랑곳 않고 극극, 아삭아삭 씹으며, 먹어봐 맛있어를 연신 중얼 거리며 눈빛에 총기 마저 든다. 채식으로 간 것이 스트레스 때문일지 몰라, 아니면 억제나 억압으로 기가 막혀 그런지도 모르지. 나 때문일까? 여러 가지 발칙한 상상을 하며 식탁에 놓인 양배추를 푸석푸석 씹는다.
한국시골집이 아지트가 되어 머문 지 꽤 오래되었다.
여기 식탁엔 아침으로 양배추, 당근이 오른다. 동생네 가족이 식료품을 택배로 보내면 양배추는 빠지지 않았다. 물론 내가 요청한 품목이다. 유기농으로 생산해 보려던 뒷마당 텃밭의 양배추는 올라오는 족족 벌레들 식사가 되었고 내 양배추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농약, 비료와 헤어진 지 오래인데도 흙은 아직 준비가 덜되었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래, 뭐든지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지...
고기를 먹고 싶었다. 미국에서 흔해빠진 바비큐며 온갖 종류의 값싼 고기가 그리웠다. 한국은 고기가 비싸고 특히 소고기와 돼지고기의 가격차이가 심하다. 제일 가까운 시골 대형마트에서 고기를 골랐다. 도대체 삼겹살은 왜 이리 비싼 거지? 지방덩어리가 뭐가 좋다고, 그래도 구어봐 제일 맛있어, 마음속 나와 너는 한참 동안 정육코너 앞의 붉은 살점들, 그 앞에서 식인종처럼 입맛을 다신다. 저거 주세요, 네 왼쪽 끝에 그거, 덩어리로 더 살 수 있나요?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2킬로 정도?
나는 횡재했다. 돼지고기 뒷다리, 그램당 700원 정도 도시마트에선 잘 보지도 못하는 기름기 없는 생살코기, 찾아보면 장조림등 뻑뻑한 요리에 쓰인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안성맞춤인 최고의 고기였다.
어디 쓰실 건데요?
지난번 보다 더 저렴한, 장날에 우연히 발견한 시장 정육점에서 그램당 675원짜리를 찾았다. 금광을 발견한 듯 반짝반짝 눈이 빛났다. 왜 또 물어보지? 살코기로만 주세요, 비계랑 껍질은 떼고...
자전거 탑튜브에 까만 고기봉지를 묶었다. 우습다. 큰 머리에 더 큰 헬멧과 멋진 사이클 안경을 쓰고 폴로 재킷으로 한껏 폼을 잡아 있어 보이려고 애쓴 흔적이 한순간에 지워지고, 자전거에 묶은 고기로 인해 사뭇 없어 보인다. 다음에는 애견간식 만든다고 해야지. 한국에서 체득한 전략이다. 없을수록 있어 보여야 하고 가능하면 멋있어 보여야 무리에서 튀지 않고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 가족이 돌려가며 읽는 니어링부부의 '조화로운 삶'에 감동을 받으면서 실상의 나는 천박하다.
더 먹어. 많이 먹고 살좀쪄라 니 얼굴 좀 봐라. 얘. 너 채식하니?
누나는 의사부인이다. 평범한 의사 부인인데 있어 보인다. 그녀는 평생 있어 보이게 살았다. 은퇴를 앞둔 남편은 아직도 개인병원을 차려 일을 한다. 있어 보이기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유지할 수 있다.
치익, 치익, 소고기다.
일산에서 몇십 분 달리면 유명한 고깃집, 누나의 단골집이 나온다.
호호호, 오늘 점장님이 안 계신가 보죠?
사뭇 거대하달만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불판이 가득 찬 강당 같은 공간에 숯불구이냄새가 나고 동그란 연통들이 금빛으로 늘어서있다. 굽신거리는 매니저의 모습에 누나가 단골인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누나는 교수들, 목사들, 저명한 이들을 이 고깃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고 상류층의 명성을 즐긴다. 짧은 치마에 스타킹 신은 아가씨들이 쟁반을 들고 안쓰럽게 오간다. 그녀들 중에 채식주의자도 있을지 모른다.
여기 봐, 이 집 마블링이 최고야
누나는 자신이 선정한 고깃집의 우수함을 과시하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올 때마다 같은 소리를 한다.
미국에선 기름기 없는고기를 더 좋아해
하긴 요즘 국뽕들의 유튜브를 보니 외국인들이 한우에 반해 미치고, 난리 나고, 경악하고, 환장한다며, 좋아요 구독은 사랑이라고 애걸하는 장면이 낯설지 않지만, 그건 공짜 좋아하는 서양인들의 가면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올해는 콩을 심기로 했다.
고기대신 콩을 먹고 양배추와 당근, 감자와 브로콜리, 상추, 시금치, 비트, 조금 있으면 등장할 마늘양파를 먹고 300일간 채식해서 참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 같다.
생명을 키우다 보니 생명의 거룩한 당당함에 위축되어 미상불 나도 모르게 페스코의 길을 따라간다.
언젠간 비건이 될지도...
또 나의 비루한 일상이 누군가의 버킷리스트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