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
최근에 만나고 있는 연인은 시간 예술을 하는 사람이다. 그때쯤 나는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이별과 동시에 3년간 몸 담았던 IT 직군에서 지칠 대로 지쳐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었다. 한 모임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했다. 살면서 한 번쯤은 드레스 코드를 갖춘 파티에 참석해 보고 싶었고 성탄절을 연상시키는 빨간색과 초록색이었기에 집에 있는 연두색에 가까운 원피스를 입었지만, 어쩐지 부족한 느낌을 받아 한 구두 가게에 들러 과감하게 빨간색 구두를 사 신었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싶었던 내면의 선택이었다.
긴장을 많이 한 것 치고 생각보다 낯을 가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회사를 다닐 때는 항상 동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는데, 몇 번의 트러블을 겪어서인지 마음을 열어 다가가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는 싶지만 새로운 사람과 관계가 성립되어 유지해 나가는 것에는 부담을 느낀 모양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제 앞자리가 삼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십 대 초반처럼 마냥 천연덕스럽게 있을 수는 없었다.
IT 직군에서 특히 내가 몸 담근 직종은 그야말로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작은 규모의 회사부터 시작했던 나는 보수적인 문화에 고개를 젓다가도 어느새 애매모호한 경계선 즈음에 자리 잡아 물들게 되었다. 경력직으로 중견기업에 이직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을 때, 나는 그 전과 다름없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야말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후에서야 그것이 자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수성에 물든 나의 미성숙함은 트러블을 자아냈다. 당시 유일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었던 친구와는 그녀의 잘못으로 연을 끊었었고, 함께했던 남자 친구는 공감 능력이 부족했기에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퇴근하고 좁은 자취방에 도착하면 술부터 찾으며 길을 헤맸다. 결국 과도한 스트레스로 수면장애를 앓게 되며 회사 생활이 어려워져 그 세계로부터 떠나는 선택을 했다. 이전에는 살아남아야만 하기에 사회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며 살았지만 그 대가로 망가진 나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들을 감당하기엔 나는 너무나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고 일반적인 사회생활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는 이미 가진 것들에 미련이 많았다. 허나 신체는 정직했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백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즈음 미래를 함께하고 싶었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져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나마 탈출구가 되었던 것은 음악과 글쓰기 수업 시간이었다. 글로 아픔을 토해내며 희망을 꿈꾸었고 아름다운 선율은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빨간색 구두는 이제는 아픔을 뒤로하고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올 것이라는 나의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무채색이었던 과거로부터 알록달록하고 강렬한 삶을 살 것이라는 삶의 의지 말이다.
사실은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잘 어울리고 싶었다. 자신 있게 나에 대해 이야기하며 같이 웃고 떠들면 얼마나 좋을까.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서로 친해져 가는데 어쩐지 나도 저렇게 밝게 웃고 떠들면서 어울리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겉옷을 챙겨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담배 피울 때 대화를 잠깐 나눈 남자가 나를 부르며 내려왔다. 가기 전에 담배를 같이 태우자는 건데 마침 떨어져서 같이 편의점까지 걸어갔다. 새벽공기가 찬데 이 남자는 나를 잠깐 보려고 겉옷도 입고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정말 담배를 피우려는 건지, 갑자기 가서 아쉬운 건지, 궁금했지만 추워 보이는 이 남자를 걱정하느라 빨리 도착해서 피우고 보내야겠다는 생각만 하며 걸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힘들 때 노래를 부르며 치유를 받았던 시간을 이야기했다. 음악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나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고 말이다. 잠깐 담배를 피우려고 했던 것과 다르게 우리는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택시에 탈 때쯤 남자는 말했다. 오늘 빨간 구두가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말이다. 정말 좋았다고 몇 마디는 더 했다. 집에 가는 길이 가벼워졌다. 누군가 나의 사소한 것을 알아주고 기억해 준다는 것은 참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후에 함께 누워 첫 만남 당시를 기억한다. 연인은 그 당시 홀린 듯이 나에게 다가왔다고 이야기했다. 빨간 구두가 정말 강렬했다고도 말이다. 좁았던 자취방은 어느새 우리가 함께 넷플릭스를 보며 요리를 해 먹고 음악을 듣는 공간이 되었다. 어느 날은 일상과 비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항상 경험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항상 일상에서 시작해서 비일상이 되는 사건, 사고를 겪고 그것이 마무리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것은 처음과는 다른 일상일 것이다. 그때 라라랜드 OST 중 클라이막스에 나오는 Mia & Sebastian’s Theme 곡의 마지막 선율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선율은 처음 음악이 시작될 때의 선율과 같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연인은 말했다. 선율도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에 시작한 선율과는 다를 것이다. 어쩐지 연인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