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이 영화를 찍을 때 하루에 결정하거나 판단해야 하는 일이 150~160개라 본 적이 있다. 건설이 시작돼고, 업무를 진행하면서 매일 아침에 그날 해야 할 일을 적어서 지워나갔다. 매일 결정해서 진행해야 하는 일이 80개나 되었다. 임시 사무실에서 아침에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외근 나가는 직원들은 나가고 난 후에 차장과 같이 판매 등 협의를 좀 더 하고 나서 책상으로 돌아오면 커피 한 잔을 들고 그날 해야 할 일의 리스트를 만든다. 아무래도 할 일을 적어서 지워나가는 즐거움도 있어서 노트나 주변에서 이면지를 활용해서 리스트를 적어 나간다. 처음엔 적어나가면서 나도 놀랐다. 하루 할 일 리스트가 80개가 되 보기는 처음이다. 통상 컴퓨터나 스마트 기기에 할 일 리스트를 넣어서 관리해 볼 만도 한데, 나는 종이에 적는다. 할 일을 적으면서 때론 내가 왜 이일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나는 대로 적는 습관 때문이다. 그게 80개나 된다니.. A4 용지 앞뒤나 이면지 두장을 채운다. 80개를 적어나가면서도 내심 뿌듯하다.
영업부장이긴 하지만 건설이 진행되는 와중에 판매 업무만을 할 수는 없었다. 건설 자재 입고 확인, 건설 진행 일정 관리, 건설 진행상황 본사 보고, 고객사 미팅, 직원 채용 면접 등 자연스럽게 2 공장의 총괄 관리 및 생산 부문은 부법인장께서 하시고, 나는 건설 진도 관리, 인사, 노무, 총무, 회계 등 행정업무와 판매를 진행하게 되었다. 하루에 80개의 업무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우선순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건설 현장에서는 우선순위 번호를 매기는 기준은 단순하다. 급한 순서대로 하게 된다. 직원 채용 면접 등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경우엔 그 시간을 제외하고 진행을 해야 하고, 고객사 미팅으로 이동을 하는 경우엔 차 안에서 이메일 등을 정리한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하는데, 정말이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닐 경우엔 난감한 상황이 발생되곤 한다. 멕시칸 타임 때문이다. 5분은 한 시간 이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 1시간은 최소 4~5시간은 생각해 두어야 한다. 일을 시작해서 마무리가 되었다고 해서 일을 끝냈다고 손을 놓으면 오산이다. 반드시 뭔가가 빠져 있다고 보면 된다. 처음엔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인식, 가치관 차이다. 크게 보면 그게 문화 차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빨리빨리가 아닐 뿐이다. 익숙해져야 한다. 난 멕시코로 왔다. 반은 멕시칸이 되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일을 늦게 하거나 하는 건 우리 체질엔 안 맞는다. 다만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이 쌓아온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어느 날 한 간부가 나에게 들어와서 면담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항상 - 아마도 어느 조직의 장들 대부분이 이 말을 달고 다니겠지만 - Open door policy라 강조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심각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앉으라 하니 멕시코에서는 사람들이 워낙 좋은 사람들이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잘 지내느냐, 멕시코 생활은 어떠냐, 가족들은 언제 들어오느냐, 나는 애가 지난주에 생일 파티를 했다. 블라블라~. 얼마간 지난 후에 나에게 별명이 뭔지 아느냐고 묻는다. 직원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란다. 모른다 하니, 내 별명이 Cinco Minutos (씽꼬 미누또스, Five minute, 5분)라고 한다. 내가 웃으면서 왜 그러냐 하니, 뭔가 지시를 하고 5분이 되기도 전에 확인을 한다는 거다. 글쎄, 난 안 그랬는데... 내 별명이 “5분” 이라니. 5분은 과장된 거겠지만, 새겨들어야겠다. 매니저는 그렇게 나의 별명을 알려 주면서, 부탁을 하고 싶다고 한다. 직원들이 산루이스포토시에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농사를 짓거나, 식당이나 호텔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니, 숙련이 될 때까지 직원들을 가르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물론 동의한다. 그 매니저와 같이 교육 계획을 협의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확인을 해야 하는지도 물어보면서 멕시코 사람들에 대해서 배워갔다.
임시사무실에서 나와서 직원 채용 면접을 보러 가기로 하였다. 임시 사무실이 협소하고, 면접을 보려는 분이 차가 없다고 하여 우리가 시내로 나가기로 하였다. 멕시코에서 차가 없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데, 겸사겸사 시내로 나가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어서 차장과 통역 직원하고 셋이서 면접을 보러 나갔다. 외국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서 인터뷰를 해보긴 처음인데, 앞으로도 처음 하게 되는 일들이 많을 거다. 한 여자분이었다. 나이는 20이 갓 되었을까 한 여자분이었다. 너무 어리다. 첫 생각은 그거였다. 너무 어리다. 아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거나 아니면 졸업 후 취업을 했는데, 직장을 옮기려 하는 것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이었다. 우리는 학생을 뽑지 않는다 하니, 인턴으로 채용을 해달라 한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인턴을 뽑아서 운영할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한국인이 면접을 보면서 매몰차게 할 수는 없었다.
인텨뷰의 절차는 밟아가기로 했다. 우리 회사가 뭐하는 회사인 줄은 아느냐? 모름. 엥? 최소한 본인이 면접을 보는 회사가 뭐하는 회사인지는 알고 와야 하지 않겠냐는 우리 생각이다. 보니까 개인에 집중한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거고, 나는 이런 경험도 있으니, 이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느냐가 기본인 듯하다. 우리는 많이 급했다.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턴을 채용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해나가고,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마치면서 우리는 인턴 채용을 하지 않지만, 혹시 추후 연락을 할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멕시코에서는 절대로 매몰차서는 안된다. 두리 뭉실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 한 예로 금주 내로 메일을 주겠다고 하면 메일 받는 걸 포기해야 하거나, 한 일주일 좀 더 지나서 다시 연락하면 또 일주일 이내 주겠다는 게 많다. 속은 터지지만, 인터뷰에서 당신은 떨어졌습니다는 말을 이후로도 멕시코에서 직원 채용 면접을 하면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첫 채용 시도는 실패였다. 산루이스포토시에 자동차사가 들어선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직원 채용이 어려 웠다. 사무직의 경우엔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이 호텔인 경우가 많았다. 생산직은 농사를 짓다가 채용된 사람도 많다. 이제 막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도시라고 봐야 할 것도 같다. 앞으로 6개월 내로 수십 명을 채용하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공간 즉, 공장 건설이 되어야 했다. 몇 개월에 수십 명 채용이 숫자로만 보면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 주변 상황과 괜찮은 인력을 채용하려는 회사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멕시코에서 우수한 멕시코 사람을 채용해야 하는데, 멕시코에서 우수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다. 그래도 채용은 지속되어야 했다. 우리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다. 판매팀에서 일해야 하는 직원들은 반드시 영어를 할 것. 그래야 영업부장인 나와 차장과 의사소통이 되고, 자동차사들과의 미팅 시 언어를 통일할 수 있다. 산루이스포토시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은 듯 아닌 듯했다. 그러다 보니, 매니저급 간부와 판매팀의 반 정도는 영어를 하고, 나머지 반은 영어를 못하는 직원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채용은 채용대로 진행되지만, 작은 회사이지만 해야 될 일들은 많았다. 격주로 지급되는 직원 급여부터, 청소 용역 업체 수배, 직원들 의료보험 업무, 은행 수표책 관리, 설비 입고 일정 확인 이런 일들도 같이 진행이 되어야 했다. 어떻게 시간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본사에 있을 때와는 아주 다른 업무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가 상당히 되었음에도 전혀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뭔가는 돼가고 있겠지.. 좀 더 지나 보면 뭔가는 보이겠지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기 싫다거나 힘이 든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사람이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 힘이 솟을 수도 있고 주저앉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행스럽게도 전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루가 재미있었고, 매일이 새로웠다. 처음엔 회의를 영어로만 해야 하는 게 부담이 되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영어가 늘어가고 있구나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직원들이 늘어가고, 지시하는 양이 많아지면서 내가 여기서는 경영인이구나라는 책임감도 느꼈다. 말 그대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회사가 생존하느냐 아니냐라는 것이다. 본사라는 큰 울타리는 여전히 나를 보호해 준다. 그 울타리 안에서 작은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 안에서 공장을 운영해야 한다. 우리 공장이 당장 어떻게 된다고 해서 본사에 어느 정도 작은 상처 정도는 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본사가 위태해지지는 않는다. 그런 본사라는 안전망 속에서의 배짱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럴 것이다. 멕시코에 처음 발을 디디고, 전혀 모르는 건설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관리하고, 고객사와의 최접점에서 일을 하고 하는 일련의 도전들이 나 혼자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본사라는 안전을 보장해 주는 울타리와, 내 옆에 있는 차장과 통역 직원, 위로는 법인장님과 부법인장님이 내가 멕시코에서 법인 판매를 책임지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을 가능케 하는 뒷 백이었다. 겸손이라는 말이 새겨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