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열 그리고 근육통
1.
환자의 첫 인상은 특징적이지 않았다. 물론 인간으로 환자의 첫인상이 아니라 환자의 증상과 그 증상으로 의심할 수 있는 질환의 첫인상을 얘기한 것이다. 젊고 건강한 환자는 크게 아파 보이지 않는 표정(relatively well being appearance)으로 직접 걸어 내원했고 '손이 저릿저릿하고 근육통이 있다'고 호소했다. 혈압과 맥박은 정상 범위였고 호흡수가 분당 25회로 조금 빨랐고 체온이 37.8도로 확인되었다. 기침, 가래 같은 증상은 없고 육안으로 확인한 편도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며 청진 결과 호흡음도 정상이었다. 구토와 설사 같은 증상도 없었으며 흉통도 없었고 복부 역시 압통 없이 말랑말랑했다. 아울러 뇌수막염을 의심할 수 있는 '두통을 동반한 경부 강직(neck stiffness)'도 확인되지 않았다. 근육통은 37.8도의 발열에 동반하는 증상이며 '손이 저릿저릿하다'는 것도 발열로 호흡수가 증가해 나타나는 과호흡(hyperventilation)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람들이 흔히 '감기 몸살'이라 표현하는 '경미한 바이러스 질환'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반적으로 '경미한 바이러스 질환'이 의심되면 환자에게 진찰 결과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권유한다.
"발열은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병력 청취와 이학적 검사 같은 진찰을 통해 입원이나 수술, 시술이 필요한 발열 질환이 의심되면 그에 적절한 검사를 시행해야 늦지 않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환자처럼 젊고 건강하며 병력 청취와 이학적 검사에서 발열과 근육통 외 뚜렸한 이상이 관찰되지 않는 경우 '경미한 바이러스 질환'으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응급실에서 혈액검사와 CT가 필요하지 않으나 많은 질환이 초기에는 발열과 근육통만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대증요법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지속하거나 악화하면 응급실을 재방문하거나 외래를 찾아 추가적인 검사를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환자에게는 그렇게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해열제를 투여하고 흉부 X-ray와 혈액 검사를 처방했는데 두 가지 질환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선 손과 발의 마비는 관찰되지 않았으나 '손이 저릿저릿하다'고 표현한 증상이 사실은 저칼륨성 마비증(hypokalemic paralysis)일 수 있었다. 저칼륨성 마비증은 문자 그대로 혈중 칼륨 수치가 감소하면서 손과 발 같은 말초의 마비가 나타나는 질환으로 젊고 건강한 사람에서 종종 발병하고 인후염 같은 상기도 감염이 선행하거나 동반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아주 합리적인 근거를 댈 수는 없으나 A형 감염이 의심되었다. B형 간염이나 C형 간염과 달리 수인성 전염병인 A형 간염은 발열과 근육통, 구토와 설사 같은 증상을 보이며 유년기에 감염될 경우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으나 성인이 감염되면 보다 증상이 심하고 드물게 전격성 간염(fulminant hepatitis)으로 악화하여 간이식(liver transplantation)을 하지 않으면 사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50대 이상은 대부분 어릴 때 A형 간염에 감염되어 항체가 있고 10대와 20대는 어릴 때 A형 간염 백신을 접종했다. 그러나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는 50대 이상에 비해 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라 A형 간염에 감염될 기회는 적었고 또 10대와 20대와 달리 어릴 때 A형 간염 백신을 접종하지는 않아 A형 간염에 취약한데 환자가 바로 그 연령에 속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환자에게 흉부 X-ray와 혈액 검사를 시행했는데 솔직히 어디까지나 '혹시나' 하는 의심일 뿐 검사 결과에 이상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흉부 X-ray는 정상이었으나 혈액 검사 결과에는 심각한 이상이 있었다. 백혈구 수치는 12,000 정도로 경미하게 증가했고 C반응단백질(CRP, C-reactive protein, 세균 감염이 되면 증가한다) 증가도 뚜렸하지 않았으나 간효소(hepatic enzyme) 수치가 1,000 이상으로 증가했다. 정상 범위가 40-50 이하인 만큼 심각한 간 손상을 의미했고 황달수치(bilirubin)가 정상 범위인 것을 감안하면 급성 손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병변을 확인하기 위해 복부 CT를 시행했다. CT 결과 전반적인 간병증(hepatopathy)은 관찰되나 간농양(lhepatic abscess), 담낭염(cholecystitis, 담낭의 염증), 담관염(cholangitis) 같은 병변은 확인되지 않았고 그외 다른 이상도 뚜렸하지 않았다. 따라서 환자는 급성 간염(acute hepatitis)에 해당했다. 최근 건강보조식품을 복용하거나 약품을 처방받은 적이 없고 알콜 의존증이 없으며 B형과 C형 간염 검사가 정상인 것을 감안하면 환자는 A형 간염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원인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급성 간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면역글로불린 M A형 간염 항체 검사(Ig M anti-HAV antibody)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어떤 종류든 급성 간염은 특효약 같은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은 치료하면 회복하나 드물게 전격성 간염으로 악화할 수 있고 그럴 때는 대학병원급 병원으로 전원하여 간이식을 고려해야할 수도 있으며 그런 경우 예후는 매우 불량할 것이라 말하고 입원을 위해 소화기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했다.
2.
응급실에는 다양한 질환을 지닌 환자들이 내원한다. 또 같은 질환이라도 '전형적인 증상'이 아닌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적지 않고 심지어 같은 증상이라도 환자마다 표현 방법이 다르다. 따라서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수수께끼 풀이 혹은 탐정 놀이와 유사하다. 다만 응급실에서 모든 질환을 완벽하게 진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가능하지 않고 응급실에서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진단하는 것이 무의미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가 '응급실에서 규명해야할 심각한 질환'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응급실에서는 증상에 대해 치료하고 외래를 통해 추가 진단이 필요한 질환'에 해당하는지 감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예를 들어 똑같이 '며칠 동안 열이 나고 근육통이 심하다'고 호소하는 환자라도 쯔쯔가무시병(가을철에 호발하는 질환으로 야외작업 중 벌레에 물려 감염된다)이나 신우신염(신장의 세균 감염)은 입원 치료가 필요하고 감기와 합병증 업는 독감-사람들이 흔히 몸살이라 표현하는-은 입원 치료가 필요하지 않고 응급실에서 증상 치료한 후 호흡기내과 외래에서 치료를 이어가면 된다. 물론 쯔쯔가무시병과 신우신염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수수께끼다. 쯔쯔가무시병은 병을 전염시키는 벌레에 물린 곳에 경계가 붉게 부어 오르고 새까만 딱지가 생긴 아주 특징적인 피부 병변이 나타난다. 신우신염은 여성이 주로 걸리고 고열과 함께 아주 특징적인 옆구리 통증과 압통이 있다. 따라서 늦여름부터 늦가을에 해당하는 시기에 야외 활동을 한 사람이 발열과 근육통을 호소하면 옷을 벗기고 쯔쯔가무시병 특유의 새까만 딱지(의학 용어로는 eschar)가 있는지 찾아봐야 하고 고열과 근육통을 호소하는 여성에게는 양쪽 옆구리를 가볍게 쳐서 통증과 압통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쯔쯔가무시병과 신우신염처럼 병력 청취와 이학적 검사만으로 단서를 찾아 손쉽게 진단할 수 있는 질환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쯔쯔가무시병의 새까만 딱지나 신우신염의 옆구리 압통 같은 특징적인 증상이 없는 질환도 적지 않고 특징적인 증상이 존재하는 질환도 이른바 '비전형적인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으로 인해 이른바 '풀랩(full lab)'이라 부르는 처방이 탄생한다. 응급실에 내원한 모든 환자에게 무조건 기본적인 혈액검사를 처방하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인턴으로 일하던 시절 응급실에 상주하는 내과 2년차 레지던트에게 환자를 보고하려면 흉부 X-ray, 심전도, 전체혈구계산(CBC, complete blood count), 이렇게 세 가지 검사 결과가 있어야 했다. 물론 내과 2년차 레지던트가 유능하고 부지런하면 '흉부 X-ray, 심전도 그리고 전체혈구계산 결과 완료'라는 경직된 원칙에 집착하지 않는다. 또 환자를 보고 받으면 직접 가서 면밀히 살펴보고 다음 단계 검사와 치료를 결정한다. 그러나 내과 2년차 레지던트가 게으르고 무능하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흉부 X-ray, 심전도 그리고 전체혈구계산 결과 완료'라는 원칙에 엄청나게 집착하고 겨우 환자를 보고 받은 후에도 좀처림 직접 환자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어쩌다 환자에게 다가가도 직접 이학적 검사를 시행하거나 면밀히 관찰하지 않고 대신 온갖 혈액검사를 처방한다. 그렇게 얻은 혈액검사 결과에 이상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검사와 조치를 취하나 이상이 없으면 일이 복잡해진다. 처음부터 어떤 특정 질환을 의심하고 시행한 혈액검사가 아니라 '아무거나 하나 걸리겠지'라는 심정으로 시행한 시쳇말로 '저인망식 혈액검사'라 혈액검사에 뚜렷한 이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막다른 길과 마주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뒤늦게 아주 명확한 증상이 나타나 그런 교착 상태가 해결되기도 하나 어떤 질환이든 그 정도면 상당히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검사 결과에 별다른 이상이 없으니 외래로 나오세요'라며 진통제를 처방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적지 않은 중증 질환이 상당한 시간 동안 혈액검사에서 정상일 때가 많다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응급실에 내원하는 환자 대부분에게 '풀랩'을 시행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물론 단순히 혈액검사를 많이 시행한다거나, 응급실에 내원하는 환자에게 기본적으로 혈액검사를 시행하는 것 자체는 어디까지나 임상의사로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환자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병력 청취와 이학적 검사를 꼼꼼히 시행하면서도 모든 환자에게 기본적으로 혈액검사를 시행한다면 당연히 문제될 소지가 없다. 그런 경우 설령 혈액검사 결과가 모두 정상이라도 꼼꼼히 시행한 병력 청취와 이학적 검사 덕분에 '심각한 질환이나 아직까지 혈액검사는 정상인 상태'에서 문제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환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병력 청취와 이학적 검사를 꼼꼼히 시행하는 노력이 귀찮아서 '풀랩'을 시행하는 것이라면 결국에는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비극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대동맥 박리도 완전히 재앙으로 치닫기 전에는 혈액 검사 결과나 흉부 X-ray, 심전도가 정상일 때가 많고 심지어 급성 심근경색조차 초기에는 심전도 변화가 명확하지 않고 심장효소(cardiac enzyme, 심장근육이 손상되면 상승한다) 수치도 정상 범위일 때가 종종 있다. 앞서 언급한 쯔쯔가무시병 역시 나중에는 간효소수치가 증가하고 크레아티닌(creatinine, 신장 손상이 있으면 상승한다) 수치가 상승하나 초기에는 혈액검사 결과는 이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환자에게 면밀한 관심을 기울여서 신속하게 질환을 진단하고 적절히 치료하는 것이 재미없고 귀찮다면 임상의사를 계속할 이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