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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Apr 02. 2020

괴물과 옥자는 현실이 된다

감독이 사랑한 동물 2

*** [봉준호의 동물들]의 연재 글로 봉준호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기 쉽지 않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캡처했습니다. ***



봉준호는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치적 깃발을 휘두르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은 어떤 깃발을 꽂아놓고 그 깃발을 향해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영화감독은 하고 싶은 메시지를 이야기와 이미지로 풀어놓는 창작가다. 봉준호 유니버스라는 말이 있듯이, 봉준호는 수많은 영화감독 중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통해 메시지를 전해 온 감독이다. 그가 자신의 영화를 통해 특유의 주제의식을 보여 주지 않았거나 못했다면, 그가 한국 영화계뿐 아니라 세계 영화계에서 이렇게 인정을 받고, 봉하이브(Bonghive)라는 팬을 가진 감독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영화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쓴 깃발이 화면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로 이어지는 초기작품들에서는 일상, 시대, 사회, 가족 안에서의 부조화와 부조리를 비판, 풍자하고 그로 인해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해진 인물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기생충>은 어느 인터뷰에서 봉준호가 말한 대로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없는데 왜 무서운 비극이 일어나는지 묻는 질문 그 자체가 메시지인 영화다.


그런데도 그는 영화의 주제의식이나 메시지를 묻는 질문들을 능청스럽게 웃어넘겨 버린다. ‘<괴물>은 반미 및 정부의 무능을 부각시킨 반자본주의 영화라는 평이 있다’는 질문에 봉준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괴물>은 청소년과 어린이를 위한 괴수영화일뿐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나도 <괴물>이 아이들과 함께 온 식구가 볼 수 있는 가족 괴수영화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괴물>뿐 아니라 그의 다른 영화들도 절대 반사회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플란다스의 개>는 개를 죽이거나 먹는 사람들로부터 개를 지키려는 사람의 고군분투를 순수하고 담담하게 그려 낸 영화이지 않은가? 봉준호의 영화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가득하지만 내가 그의 영화를 반사회적이라고 보지 않는 이유는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가리키려고 그의 말처럼 깃발을 꽂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끌어가는 이야기와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는 이미지다. 그에게 언제나 우선하는 건 영화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어떻게 가장 영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인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감독의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그의 영화는 이야기와 이미지만으로 충분히 재미있다. 봉준호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면서 ‘이미지꾼’이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이야기와 이미지 뒤에 숨기고, 가리고, 여기저기 흩어 놓는다.



미래가 배경인 <설국열차>와 <옥자>에서 봉준호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대안과 방향으로 제시한다.


봉준호 영화 일곱 편의 인물과 시대는 가지각색이다. 그중에서 미래가 배경인 영화는 <설국열차>와 <옥자>다. 두 영화도 그의 초기작품들처럼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체제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두 영화는 나머지 영화들과 다르게 영화의 결말에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거나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는 대안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체제의 불평등과 환경파괴로 고립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하는 영화다. 커티스는 앞칸으로 가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남궁민수는 옆문을 열고 기차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요나와 티미는 전복된 기차의 옆문으로 탈출해 바깥세상을 만난다. 그저 앞으로만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서 앞으로만 가면 된다고 믿는 인류에게, 감독은 옆으로 방향을 틀면 그쪽이 인류가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앞이 된다고 말한다.


봉준호가 <설국열차>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면, <옥자>에서는 인간이 자연과 동물을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산골마을의 미자와 뉴욕의 루시는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미란도그룹의 다국적 네트워크, 거대한 자본은 텔레비전도 잘 나오지 않는(때려야 말을 듣는) 산골까지 닿아 있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봉준호는 육류산업이 도시뿐 아니라 산골짜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 주며 동물을 고기로, 상품으로만 바라보는 산업의 관점과 더 싸고 맛있는 고기를 만들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실태를 고발한다. 미란도 그룹은 슈퍼돼지를 칠레에서 발견한 품종이라고 소개하지만 사실은 유전자를 변형한 동물이다. 옥수수, 콩 등 유전자 조작 식품은 이미 우리의 식탁 위에 올려진 지 오래되었다. 곡물뿐 아니라 처음으로 유전자가 변형되어 식탁에 오른 고기는 연어인데 성장 속도를 2배 빠르게 만든 연어는 일반 연어의 절반에 불과한 18개월이면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크기로 자란다고 한다. 지금 우리의 식탁에는 유전자가 조작되거나 변형된 음식이 몇 종류의 곡물과 어류뿐이지만 이는 식량난 해결이라는 허울좋은 명분과 생산비용을 낮추려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점차 더 많은 종으로 확대될 것이다. 물고기보다 더 고등동물인 포유류에게도 실험을 할 것이고, 감독은 그 동물이 바로 옥자 같은 슈퍼돼지라고 말한다. 봉준호는 나아가 유전자 조작이 사람에게도 행해질 것을 걱정한다. 그의 말대로 올림픽에 나선 선수들은 이제 도핑 테스트가 아닌 유전자 테스트를 받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치료 목적으로 연구, 개발되고 있는 유전자가위 기술이 언젠가 인간의 욕심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먼저 만나게 될 동물은 괴물일까, 옥자일까?


“옥자가 메타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런 상징도 없죠. 나는 단순히 관객이 이런 동물이 아주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랐어요.” 옥자에게 아무런 상징도 없다는 봉준호의 말은 깃발을 숨기기 위한 몸짓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 말에서 봉준호는 깃발을 슬쩍 흔들어 펄럭이는 소리를 들려 준다. 미자와 옥자처럼 인간도 동물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들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옥자를 데려오기 위해 서울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미자는 돼지 저금통을 바닥에 던져 깨뜨린다. 돼지 저금통을 깨뜨리는 조금은 과격한 행동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영화 마지막까지 옥자를 구하려는 미자의 동력이 된다. 뉴욕에서 슈퍼돼지로 선발된 옥자가 공개되는 날, 하늘에는 축제를 알리는 커다란 돼지 풍선 하나가 떠 있다. 신호를 받은 ALF단원들이 작전을 실행하고, 옥자를 가리고 있는 천막 기둥의 뾰족한 끝이 풍선을 찌르며 슈퍼돼지 프로젝트의 진실을 알리는 전단지가 뿌려진다. 돼지 저금통을 깨트리고 돼지 풍선을 터트리는 장면은 동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행동하고 고기를 먹는 것에 생각해 보게 만드는 설정으로 사용된다. 돼지 캐릭터의 죽음(깨진 저금통과 터진 풍선)은 도축장 장면에서 실제로 셀 수 없이 많은 슈퍼돼지들의 죽음과 연결되고, 슬픔과 아픔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봉준호의 바람처럼 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손에 의해 옥자 같은 동물이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미 오랫동안 동물들은 가축화나 육종 등 인간의 개입으로 자연선택이 아닌 인위선택의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 여름이 제철이었던 딸기가 비닐하우스로 들어간 후 겨울에 제일 맛있는 과일이 되었듯 닭이 하루에 한 개 꼴로 달걀을 낳는 것은 인간이 건강하고 알을 잘 낳는 닭들끼리 교배를 하게 해서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달걀을 꾸러미로 살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사실, 닭이 하루에 한 개꼴로 달걀을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잘 모를 것이다.)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는 편의와 ‘음식은 비싸면 안 된다’는 편견은 동물들의 생명과 권리 같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 산업은 이 욕구와 욕망을 부추긴다. 더 맛있고 더 많은 고기를 얻기 위한 슈퍼돼지는 인간의 필요(또는 실제로는 전혀 필요없지만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일부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유전자가 조작된 동물들이 원래 의도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봉준호는 이미 그의 전작 <괴물>을 통해 이런 상황을 경고한 적이 있다. 괴물은 인간의 오만과 실수가 만들어낸 괴생명체다. 괴물은 물리적인 힘으로 사람을 죽이고 사회에 직접적인 혼란을 가져온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크고 넓은 한강에 흘려보낸 독극물이 그런 괴물을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 어떤 결과로 돌려줄지 모르는 일들을 한 번, 또 한 번씩 하고 있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옥자를 만들었지만, 분명히 괴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옥자와 괴물이 생겨난 과정이 다르기에 인간이 실수하지 않는다면 괴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기술을 신뢰하고 낙천하는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옥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괴물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죠니가 옥자에게 남자친구로 소개하는 알폰소는 다른 슈퍼돼지들에 비해 흉측한 모습인데다가 행동도 난폭하다. 폭력적인 성향의 슈퍼돼지가 나온 게 미란도그룹의 의도인지 그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실험실의 기계장치들과 그곳에서 미쳐가는 죠니를 보면 알폰소를 통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괴물과 옥자는 아직, 이 세상에 없는 동물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먼저 만나게 될 동물은 괴물일까, 아니면 옥자일까?



닭장 속에 있던 닭들이 마당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언젠가 동네에 있는 작은 치킨집에 튀겨져 있는 통닭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대충 20마리 정도가 쌓여 있었는데 우리나라 전국에 치킨집이 3만 개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하루에 최소한 60만 마리의 닭이 치킨집에서 죽는 것이다. (물론 그전에 이미 생을 마감했겠지만 상징적으로 말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름이면 서울인구 정도의 숫자가 사라진다. 규모가 큰 가게와 마트, 식당으로 납품되는 닭까지 곱하고 더해 보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통계는 어림을 뛰어넘는다. 한국육계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2017년 한 해동안 국내에서 도축된 닭이 9억 3600만 마리로 하루에 약 250만 마리꼴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매년 500억 마리의 닭이 고기가 되기 위해 도축되고 있다.


미란도그룹에서 옥자를 데려가자 희봉은 미자가 좋아하는 닭백숙을 해서 미자를 달래보려 한다. 미자는 먹지 않고 서울로 떠난다. 옥자를 데려온 후 일상으로 돌아온 미자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희봉과 또 밥을 먹는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 그 밥상에는 고기반찬이 없을 것이다. 미자는 슈퍼돼지들이 죽는 것을 보고 왔고, 분명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못 먹겠다고 했을 것이다. 돌아온 일상에서 고기가 사라진 밥상 외에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다. 희봉과 미자는 그동안 닭을 닭장에 넣어 키웠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옥자와 새끼돼지뿐 아니라 닭들도 마당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이것이 바로 봉준호가 보여 주는, 그가 전하고 싶은 동물을 향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미자는 당분간 고기를 먹지 않을 거고 어쩌면 평생 채식을 하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채식을 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의 몸이 더 이상 고기를 거부하지 않게 됐을 때, 닭이 제 명대로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아니면 정말 닭백숙이 먹고 싶을 때는 닭을 잡아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을 먹어 왔고, 먹을 수 있고, 먹고 있다. 고기만이 줄 수 있는 감칠맛, 그 맛은 아직까지 어느 식재료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맛있다고 해서 매일 먹거나 많이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인간의 욕망, 오만과 언제 어디에서나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온 산업은 동물의 생명과 권리를 함부로 빼앗고, 나아가 인간의 삶을 무너뜨리고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봉준호는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깃발을 흔들고 있다. 봉준호의 영화로 모여드는 꿀벌들(Bonghive의 팬들)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그가 들고 있는 깃발(Bongflag)을 보고 행동하기를 바라고, 나도 그 움직임에 기꺼이 함께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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