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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Apr 12. 2020

팬데믹, 그리고 동물들

'봉준호의 동물들'을 마치며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좋아했다’고 말하는 건 요즘에는 예전만큼 영화를 자주 보지 않고 별로 관심을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봉준호와 그의 영화는 좋아한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 일은 모르듯 동물을 돌본 적도 있고 최근에는 동물 관련한 정보와 이슈를 꾸준히 접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앞서 말했듯,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동물을 사랑한다. 연재글 ‘봉준호의 동물들’은 내가 ‘좋아했던 영화’와 ‘좋아하는 감독’과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동물’을 다루고 있다.


‘봉준호의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해서 글을 써 보면 어떨까?’라고 생각이 들었던 건 작년 5월 <기생충>을 보고 난 후였다. 쮸니, 베리, 푸푸 세 마리의 개가 영화에서 비중있게 다뤄지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다른 이유가 아닌 게으름 때문이었다. 막연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건 해를 넘긴 올해 초, <기생충>의 미국 아카데미상 수상에 대한 기대와 반응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분위기에 편승해 조회수를 조금이라도 더 올릴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꾀를 부린 거였다. 나는 부랴부랴 봉준호의 예전 영화를 다시 보면서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을 찾았다. 그렇게 시상식이 열리기 며칠 전, 첫 번째 글을 올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바람이 빠져 버리는 풍선처럼 나의 부푼 마음이 쪼그라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생충>은 오스카의 주요 4개 부문의 상을 휩쓸며 전세계인이 시선과 주목을 받았고, 한국영화사 100년의 쾌거로 영화 역사에 획을 그었지만 축하의 박수와 축제 분위기는 짜파구리 만찬을 끝으로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검색어 ‘기생충’은 ‘코로나’로 대체되었고, 영화세트장을 복원하고 봉준호 거리를 만들겠다던 지자체들의 공약은 더 이상 꺼낼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영화와 감독의 덕을 보겠다는 잔꾀는 연재글을 쓰는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혔다. 너무 짧지 않게 쓰자고 했던 첫 번째 글의 분량은 이후 글의 기준이 되었고,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 5일에 한 번씩 글을 올리기로 한 결정은 늘 마감의 압박을 느끼게 했고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물론 누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다. 분량을 줄이고 일정을 미뤄도 되는 것이지만 스스로 정한 약속을 한 번이라도 어기는 순간 연재글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분위기를 따라 자연스레 바깥활동이 더 줄어들면서 글을 쓰는 데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낼 수 있어서 연재글을 마치는 측면에서는 개인적으로 격리생활이 꽤 도움이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봉준호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팬데믹(pandemic) 사태에서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을 짚어보게 됐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를 비롯해 최근 20년 사이에 유행했던 사스, 메르스, 에볼라, 지카 바이러스는 야생동물에게서 인간에게 전파되었다. 전문가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식량, 물건을 만들기 위해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행위가 동물들의 서식지를 줄이면서 앞으로 인간이 야생동물과 접촉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고 이런 바이러스 유행병이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울러 일부 문화권에서 야생동물은 식용되고 약용으로 쓰이며 밀렵과 밀매가 횡행하고 있는데 이런 행위를 근절하는 것이 질병확산을 막고 동물 멸종의 원인 중 하나는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려동물에 대한 뉴스도 눈에 들어왔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가 창궐하자 일부 사람들이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아파트 고층에서 던져 죽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반려동물이 바이러스를 옮긴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동물들을 돌보는 뉴스도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도시에 남겨진 동물들을 돌보는 활동가가 소개되었고, 2천 명의 봉사자가 이 활동에 지원했다고 한다. 우한이 봉쇄되기 전 도시를 떠나 돌아가지 못하거나 반려동물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SNS를 통해 이런 활동을 알게 됐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달라고 호소했다. 이 단체는 이렇게 우한에 남겨진 동물들이 5만 마리일 거라고 추정하며 자신들이 1,000마리 정도를 돌봤다고 한다. 우한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데려오기 위해 전세기를 띄웠을 때, 반려동물과 같이 갈 수 없기에 귀국을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외출과 이동을 통제했고, 밖에 나가면 벌금을 물렸다. 장 보기 같이 필수적인 외출만 허용되었는데 반려동물 산책도 그 사항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웃에게 개를 빌려 달라고 하거나 강아지 인형에 목줄을 채우고 살아있는 개인 척 산책을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위기에 닥치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한다. 가족이 먼저고, 아는 사람이 먼저다. 이 구분에 따르면 동물은 절대로 사람보다 우선할 수 없다. (물론, 동물들도 인간보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으로 생각할 것이지만 인간 중심의 환경에서 동물은 약한 존재다.) 위의 뉴스에서 동물을 던져 죽인 것은 분명히 잘못이고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본인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혼란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인간이 취한 극단적인 행동의 하나로 본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동물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난 사례일 뿐이다. 이처럼 동물을 죽이거나 버린 경우도 일부 있었지만, 다행히도 앞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동물들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동물들을 돌봤고, 끝까지 동물들과 함께했고, 동물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책을 폈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생김새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편을 갈라왔고, 특히 이처럼 위기를 맞았을 때 소수와 약자에 대한 차별은 혐오와 폭력으로 드러났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그것이 문제라는 걸 깨닫고 구분을 없애며 다름과 다양함을 아우르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노예는 해방됐고, 여성은 투표를 하며, 노인들은 보호를 받고, 아이들은 꿈을 꾼다. 그동안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을 잃었다. 그럼 이제, 동물들과도 함께 살아갈 때가 아닐까?


코로나로 우리는 생명과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자랑해 온 문명과 시스템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때문에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됐다. 인간이 지구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은 강한 힘을 가졌지만 지구의 주인이 아니고, 그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번 팬데믹이 우리가 동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동물과의 공존을 위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찾고 행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코로나로 지치고 힘든 나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나는 코로나 이후에 찾아올 희망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물론 개봉이 연기된 <기생충>의 흑백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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