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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Mar 28. 2020

맛있는 고기 그리고 사랑

감독이 사랑한 동물 1

*** [봉준호의 동물들]의 연재 글로 봉준호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기 쉽지 않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캡처했습니다. ***



사람들은 동물을 사랑한다. 동물을 귀여워하고, 동물을 만나면 만져 보려고 하고, 먹이를 주려고도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도 동물에게 다가가는 걸 좋아하지 않거나 조금 무섭기 때문이지, “저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동물들과 언제나 함께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개, 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고 물고기, 새, 돼지, 고슴도치, 이구아나, ... 개미핥기, 북극여우... 는 사람들 곁에서 같이 살아가는 반려동물들이다.


인간이 이렇게 동물을 키우고 돌보는 건 근래의 일이 아니다.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동물을 길들여왔고, 함께 살아왔다. 인간은 동물에게 약간의 먹을 것을 주고 그들에게 알, 젖, 털, 가죽 등을 얻었다. 인간보다 뛰어난 동물들의 능력을 이용해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먼 길을 가기도 했다. 이처럼 경제적, 실용적인 이유와 전혀 상관없이 동물을 돌보고 기르는 걸 자체를 즐겼다는 연구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동물은 고기로서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은 고기를 먹으므로써 더 많은 열량과 단백질을 얻었고, 이것은 뇌 용량의 증가와 신체의 발달 등 인간의 진화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고기는 정치, 종교, 문화, 관습을 통해 통제돼 왔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량으로 생산, 소비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렇게 산업으로서 고기를 공급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동물 학대 등의 문제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동물들의 권리를 보호하자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런 움직임은 더 활발해지고 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동물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인물들의 마음과 행동은 눈을 통해 전달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동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인물은 현남과 미자다. 현남은 잃어버린 개를 찾는 아이, 할머니, 윤주를 만나고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아파트 옥상에서 개를 던져 죽인 사람을 보고 죽을힘을 다해 쫓는다. 결정적으로 그는 부랑자에게 잡아먹힐 뻔한 개를 구해낸다. 현남이 부랑자의 물리적 폭력이라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생명을 지켰다면, 미자는 생명을 고기로만 생각하는 사회와 체계에 정면으로 맞선다. 미자는 작은 아이지만 거대한 자본과 어른들의 세계를 박살 내며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그들의 논리를 익혀 그들이 원하는 것에 맞춰 옥자를 다시 데려온다.


결과적으로 두 인물은 동물을 살려내지만, 봉준호는 현실에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생명을 구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지 다른 힘을 빌린다. 현남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연예인이 첫사랑인 자신을 찾는다는 장난전화에 마음이 들뜨고, 뉴스에서 은행털이범에 맞선 용감한 여성을 보고 ‘그래도 저 언니 저걸로 완전히 뜬 거야. 테레비에 한 번 나오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라고 말한다. 현남은 개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부랑자를 보고서 겁을 먹지만, 신고를 하지 않고 개를 구하려고 달려든다. 후드티의 두 끈을 꽉 잡아당기고서 그를 움직이게 한 힘은 더 이상 개를 죽게 둘 수 없다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 우선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멋진 사람으로 텔레비전에 소개되고 싶은 욕심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국에서 자신을 취재해갔다며 기대하지만 부랑자와 경비원의 인터뷰만 나오는 뉴스를 보고 실망한다. 마찬가지로 미자가 옥자를 데려오기 위해 서울로, 뉴욕으로 길고 험한 여정을 떠날 수 있었던 데는 옥자를 사랑하는 마음 이외의 동력이 있다. 루시-낸시의 관계에 빗대어 미자-옥자를 자매로 보는 관점도 있는데 그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는 힘은 은혜를 갚는 것이다. 영화 초반 지름길로 집에 가려던 미자는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한다. 그때 옥자가 기지를 발휘해 미자를 구해 준다. 미자는 옥자에게 목숨 하나의 빚을 졌다. 죽을 뻔했던 자신을 살려 준 데 대한 사례는 죽을 위험에 놓인 옥자를 살려 주는 것이다. 봉준호는 미자와 옥자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도 서로 은혜를 갚은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봉준호는 동물에 대한 사랑이 때로 너무 지나치면 그 사랑의 행동이 오히려 동물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염려한다. 옥자를 데려오기로 마음을 먹은 미자는 저금통을 들어 바닥에 떨어뜨려 깨부순다. 굉장히 급하고 극단적인 행동이다. 희봉은 행여 손녀가 다칠까 조심하라며 깨진 조각을 치운다. 배경이 서울로 바뀌어, 차량에서 탈출한 옥자는 지하상가에서 뛰어다니다가 쓰러진다. 그곳에서 옥자는 깨진 도자기 조각에 찔려 피를 흘린다. 옥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고 제이가 그것을 발견해 빼 준다. 미자가 깨뜨린 저금통 조각이 옥자의 발을 찔렀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동물을 사랑한다면서, 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다면서 하고 있는 행동이 그 동물에게 상처를 주거나 동물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경우들이 있다. ALF단원들은 옥자의 몸에 카메라를 설치해 미란도 그룹의 실험실을 촬영한다. 그것은 옥자를 위한 일이고, 수많은 슈퍼돼지를 위한 일이고, 나아가 동물과 사람과 이 사회를 위한 일이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전해지는 영상을 보면서 단원들은 곧 자신들이 세웠던 계획으로 옥자가 너무 큰 충격과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후회한다.



우리가 쉽게 고기를 살 수 있는 건 동물을 죽이는 일을 대신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동물은 생명뿐 아니라 고기로도 존재한다. 앞선 글에서 살펴봤듯이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그 행위 자체에 대해 분석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불과 몇십여 년 전만 해도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원할 때에 고기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해진 건 동물을 죽여서 고기라는 상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자본, 유통, 시스템 때문(또는 덕분)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옥자>고, 미란도 그룹 직원들이다. 그들은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는 죽인 동물, 즉 고기다. 그들에게 동물은 죽었을 때(죽였을 때)만 가치가 있다. 동물들이 더 오래 살수록 먹여야 할 사료는 많이 들고, 생산비용은 올라간다. 그들은 동물들을 더 크게, 더 빨리 키워야 한다. (옥자의 큰 몸집은 봉준호에게는 메이-토토로의 비율을 적용한 것이지만 미란도 그룹에게는 더 많은 고기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 없이 한방에 목숨을 끊어 주는 것이 그들의 죽음을 존중하는 마음이고 가장 윤리적인 방법이다.


이렇듯 우리가 쉽게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 동물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축장처럼 동물을 죽이고, 자르고, 해체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 과정, 그 모습을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고기를 먹기 위해 직접 동물을 죽여야 한다면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거나 지금보다 덜 먹게 될 것이다. 그런 경험과 기억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동물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육류 산업의 대량생산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물들은 얼마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돼지열병이나 조류 독감 같은 유행병이 돌면 셀 수도 없는 동물들이 산 채로 땅에 묻힌다. 동물을 키우고 죽이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늘 신체적 위협과 정신적 스트레스에 노출돼 있다.


생명과 고기라는 생사의 여부로 갈린 동물의 두 모습, 이 경계에 양쪽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인물이 죠니다. 그는 옥자를 보고 놀라워하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미란도 그룹의 실험실에서 옥자를 알폰소와 강제로 교미하게 하고, 옥자의 몸에 주사기를 찔러 살을 뽑아내기도 한다. 그는 마치 미치광이 같고, 술 없이는 실험실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그는 사실 자기는 정말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울먹인다. 나는 그 말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이나 합리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죠니는 정말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연스레 동물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싶었을 거다. 그는 미란도 그룹에서 일하면서 동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연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겠지만 그에게 맡겨진 일은 그가 기대한 것과 달랐고, 그를 괴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흰 가운을 입으면 무너져버리는 죠니를 보며 나는 어느 책에서 읽었던 생물학자의 고백이 떠올랐다. ‘내 생물 수업을 수강했던 여학생이 대학교 수의학과에 합격하고 얼마 지난 후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고백한 적도 있다. “동물이 너무 좋아서 동물의 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수의학과에 입학했는데, 매일 내가 하는 건 귀여운 동물을 실험재료로 죽이는 일이에요. 너무 힘들어요.” 그녀의 심경이 바로 내 심경이다.’ 만약 죠니가 일자리를 알아볼 때 동물 관련한 직업군이 더 다양했다면, 그는 미란도 그룹이 아닌 ALF에서 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기가 될 동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들에게 이름이 없어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이 식물을 먹을 때의 판단기준은 먹었을 때 몸에 이상이 생기는지 아닌지의 여부다. 하지만 동물을 먹을 때의 판단 기준은 다르다. 어느 동물은 먹고, 어느 동물은 먹지 않는 판단은 자의적인데 일차적으로는 문화와 사회 분위기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줬는지의 여부다. 경비원과 부랑자에게 개는 고기로도 먹을 수 있는 동물이지만 삔돌이, 아가, 순자는 그럴 수 없다. 맛있는 고기를 위해 키운 슈퍼돼지에게 미자는 이름을 지어줬다. 미자는 절대 옥자가 고기가 되게 둘 수 없다. 우리는 마트에서 파는 고기를 카트에 담으며 고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살아 있는 동물에게만 허락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름이 있든 없든, 살아 있든 죽었든 동물을 사랑한다. 시츄도 사랑이고, 치킨도 사랑이다. 우리는 양들과 사진을 찍고 내려와 양꼬치를 먹고, 돼지들의 달리기를 구경하고서 돈가스를 먹는다. 동물을 향한 두 사랑의 모양은 분명히 다르다. 봉준호는 그의 영화에서 동물을 향한 사랑의 다른 모습을 모두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느 쪽인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아울러 누군가 그 방향으로 용기를 내어 발을 내딛는다면 색종이를 뿌리고 함성을 보내며 현남에게 힘을 실어 준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응원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미자는 도축장에서 옥자를 데리고 나가며 뒤를 돌아본다. 이름이 없는 수많은 슈퍼돼지들... 미자의 뺨은 발갛게 젖어 있다. 그때 부부로 보이는 슈퍼돼지 두 마리가 다가와 자신의 새끼를 미자와 옥자에게 보낸다. 옥자는 새끼돼지를 입으로 물어 숨긴다. 다시 돌아온 산골에서 미자와 옥자는 새끼돼지를 돌보고 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미자는 새끼돼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크레디트에도 이름이 없는 것을 보니 감독도 이름을 지어 주지 않은 것 같다. 고기가 될 동물도, 이름이 없는 동물도, 우리는 모두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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