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쿵.
엿 같은 모닝 알람이다. 오늘은 일찍부터 카페라도 가야 하나 싶었다가 불쑥 화가 치민다. 주말 아침부터 제 집에서 쫓겨나야 하다니. 이쯤 되면 인류애가 사라질 지경이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의자 위에서 뛰어내리는 소리, 고무공을 바닥에 튕기는 소리, 거실을 가로질러서 달려 나가는 소리. 이 정도면 애를 운동장에 풀어놔야 하는 게 아닐까. 아침부터 아주 작정했구나. 욕이 나오려다가 간신히 삼켰다. 역류성 식도염이 다시 도질 것만 같았다.
경비실 호출 버튼을 눌렀다. 애써 올라가 봤자 나만 열받고, 소득 없는 일에 힘 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호출음만 울리고 받지 않는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가. 아니면 일부러 안 받는 걸까. 결국 내가 또 올라가야 한다. 좋게 말하자.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자꾸 뛰니까 머리가 울린다고. 몸이 안 좋으니 부탁드리겠다고. 그 정도면 통할 거라 믿었다.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엔 캐릭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는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여전히 아이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났다. 이런 건 현장에서 잡아야 나도 덜 무안하고 그쪽도 변명할 수 없다. 벨을 눌렀다. 분명 소리가 울렸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두어 번 더 눌렀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뛰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모른 척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조용히 했으니 내려가라는 의미인가.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피해를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확실한 경고가 될 수 있을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쿵쿵 뛸 때마다 머릿속 스크린이 켜졌다.
다시 벨을 불렀다. 띵동 띵동 띵동. 연달아 눌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띵동. 마지막으로 한 번 눌렀다. 경고 사격이라는 의미였다. 대꾸가 없었다. 발끝으로 문을 걷어찼다. 처음엔 살짝, 그다음엔 힘껏, 마지막엔 체중을 실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문에는 운동화 밑창에 검게 쓸린 자국이 남았다. 이러다가 옆집에서 신고를 하는 건 아닐까. 그만하자. 일단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자.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그 여자였다. 그 순간부터 기억이 어딘가 뭉개졌다.
"이 미친년이 뒤지고 싶냐. 죽여줘?"
눈앞이 새하얘지고 숨이 가빠왔다. 귓속에서는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생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불빛이 하나둘 꺼져갔다. 남은 건 몸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뿐이었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가속 페달을 꾹 밟았다.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이 몸을 제멋대로 끌고 갔다. 멈출 수도, 멈출 생각도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현관벨이 부서져있고, 문에 붙어 있던 스티커들이 거의 떨어지고 너덜거렸다. 손등이 따끔거렸다. 내 손에는 피가, 그리고 문에도 같은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려는데 문이 슬며시 열렸다. 위층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걸쇠가 채워져 있지만, 그 눈빛은 문밖으로 뚫고 나올 듯 선명했다. 황당스럽다는 기색, 노골적인 경멸,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니 입이 간질거린다.
"조용히 할 테니까 내려가세요."
여자의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문을 걷어차는 소리, 피 묻은 손등, 문에 남은 검은 자국들 -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벙찐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 머릿속이 백지가 됐다. 내려가야 했다.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말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더 나아갔다가는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말 거다. 징역, 전과, 낙인. 내 인생이 무너지는 장면이 똑똑히 그려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서면서도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계단 아래까지 나를 쫓는 것만 같았다.
집에 들어와서도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상상 속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재생됐다. 그게 현실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노트북을 열고 '층간소음 보복'을 검색했다. 관련 뉴스가 줄줄이 나왔다. 한 기사엔 현관문을 걷어차는 장면이 CCTV 캡처 화면으로 실려있었고, 한 기사엔 변호사의 짧은 코멘트가 적혀있기도 했다. 재물손괴죄, 협박죄, 스토킹죄, 주거침입죄 등. 여러 죄명으로 기소될 수 있고 실형 가능성도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특히 주거침입죄는 집안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적용될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주거자의 평온을 깨트리는 행위를 한다면 처벌받을 수 있다니. 그런데 왜 층간소음에는 아무런 죄명이 적용되지 않는가. 기사를 마저 읽었다. 내게 해당하는 부분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1.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죄질이 더 나쁘게 보일 수 있다.
2. 층간소음을 참아온 사정을 호소한들 선처 사유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오히려 보복성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더 크다.
3. 합의해도 실형을 피하기 어렵다.
결국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수준에서 보복하거나, 조정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증거를 모아서 민사로 가거나, 그냥 냅다 들이박고 갈 데까지 가는 거다. 어떤 방법을 택하더라도 골치 아픈 싸움이 될 듯했다. 다만 더 이상 누군가에게 중재를 받고 싶진 않았다. 조정위원회든, 경비실이든, 경찰이든. 결국 그들에게는 남의 사정이니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층간소음의 증거를 모으고, 문제를 키우지 않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