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은 합당한 협의 없이 결정됐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퇴사까지 한 달 여유를 두고 꺼낸 말인데, 다음 주에 바로 처리될 줄은 몰랐다. 대표는 직원을 정리해야 할 상황이었다며, 먼저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대표는 내가 추석이 지나고 그만두겠다고 말할까 봐, 당사가가 아니라 팀장에게 퇴사 일정을 물었다. 둘 사이에 얘기된 바가 있을 거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노동자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날짜를 다시 정하자고 따지진 않았다. 억울하다는 생각보다는 '차라리 잘됐다'는 마음이 더 커서였다. 한두 달 더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업은 점차 기울어갔다. 거래처는 광고를 유지하기 어렵다며 계약을 끊었고, 대표는 가망도 없는 콜영업만 종일 붙잡고 있었다. 남은 거래처들도 인맥으로 유지하고 있을 뿐, 언제 계약이 끊어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우리는 물이 새는 배에 탄 셈이었다. 직원들은 회사가 언젠가 침몰할 거란 걸 알았다. 그걸 모르는 건 대표뿐이었다. 업계가 불황이라서? 경쟁이 심해서? 직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대표는 직원들의 의견도 구하지도 않고, 사업이 안 되는 이유를 자꾸만 헛짚었다.
직원 입장에서 할 말은 많았다. 대표가 회사에 관심을 좀 가지라고, 직원들 교육부터 시작해서 업무 회의도 해야 한다고, 업체들 등쳐먹는 식으로 계약 건수만 늘리지 말자고, 잘 되지도 않는 콜영업은 적당히 하고 다른 방법도 찾으라고, 공장식으로 일 할 게 아니라 퀄리티를 높이자고, 직원들 업무 형평성 좀 고려하라고. 하나하나 짚어서 문제 삼고 싶었으나 말해서 바뀔 거란 기대가 없었다.
몸이라도 편했더라면 버티지 않았을까. 다른 직원들보다 두 시간 일찍 출근하고, 더 까다로운 업무를 맡는데도 숨 돌릴 틈이 없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껴서 타이핑하고, 점심시간을 기꺼이 반납해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표는 이런 노고를 알면서도, 알아주면 투정을 부릴 거라 생각했는지 모른 체했다.
팀장은 간식을 사다 준다든지, 힘들지 않냐는 말을 건넨다든지 제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의 신경증은 좀처럼 견디기 어려웠다.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는다든지, 정수기에서 얼음이 안 나온단 이유로 씨발 소리를 한다든지, 괜한 트집을 잡아서 업무적으로 괴롭힌다든지. 그런 나날이 이어질수록 내 심장은 더 작고 말랑해졌다. 그날그날 팀장의 기분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적잖이 지쳐갔다.
퇴사를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늦은 밤 취객들이 지나는 거리였고, 일행들과 2차를 파하고 3차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H' 형은 내 어깨를 감싸고 일행들과 거리를 멀찍이 벌렸다. 그때 나는 하소연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 인생은 왜 자꾸만 안 풀릴까. 왜 계속 후회할 선택만 할까. 형은 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나는 술기운 탓인지 눈시울이 붉어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건 네가 잘못한 게 아냐."
뭐가 내 잘못이 아니란 건지, 형은 알 수 없는 말만 건넸다. 지금껏 치열하게 살지 않은 것도, 인생에서 오답만 족족 골라내는 것도 다 내 탓인걸. '잘 될 거야'도 아니고, '괜찮아'도 아니고, '네 잘못이 아냐'라니. 세상에 그런 속 편한 말이 어디 있나.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나름대로 발버둥 치는데도 자꾸만 출발선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을 아냐고. 이제는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도 모르겠는 사람 마음을 아냐고. 차라리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기껏 위로를 건넨 사람이 속 터지는 생각만 머릿속에 빙빙 돌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형이 한 말을 잘못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형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네가 한 것들이 잘못된 건 아니야'일지도 모른다. 네가 살아온 삶을 '잘못'이라고 이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쉽게 단정 짓지 말라고, 지금까지의 삶을 실패라고 뭉뚱그리고 도망치지 말라고. 형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건넸지만, 그 말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나는 몇 번의 이직을 경험할 때마다 자책했다. 그때 왜 그랬을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왜 나는 버티고, 참고, 이겨내지 못했을까. 그걸 모두 '잘못'이라고만 여기고, 고작 네댓 번의 이직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었다. 인생을 살면서 깨지고, 상처 입고,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는 걸 외면하면서. 그때마다 손에 쥐었던 뭔가가 슥- 하고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백수 생활이 곧 두 달째가 되어간다. 추석 연휴에는 스스로 합법 백수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불법 백수라 주변에도 민망한 입장이다. 실은 일을 그만두자마자 1인 사업을 준비했는데, 영 신통치가 않다. 그렇다고 당장 이직을 하기에는 준비했던 게 아쉬워서 헤매고 있다. 처음에는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아는 것도 없고 막막하기만 하다. 어떤 날은 바쁘게 사업 준비를 하다가도, 어떤 날은 다 때려치우고 회사나 들어갈까 고민하곤 한다. 그래도 회사를 다닐 때보단 일이 즐겁다.
요즘에는 회사를 헛 다니진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7년간 비슷한 일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노하우도 많이 쌓였고,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헤딩하는 실력도 늘었다. 이직할 때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었는데, 매번 스타트 지점에 다시 선 건 아니었다보다. 내가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아픈 경험들도,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자양분이 되는 게 아닐까. 지금 이 선택을 추후 어떤 결과로 맞이할진 모르겠지만, 후회 없는 선택이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내가 네게 말해주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무 아파하지도 말고, 너무 자책하지도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