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삶을 여행이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

오늘의 여행길을 나서본다.

by Maybe



마트에 가는 길, 고양이를 만나고, 커피를 마시고, 우체국 아저씨와 인사를 나눈 하루. 특별한 건 없었지만, 마음은 여행처럼 가벼웠다.




아침 일찍 남편을 출근시키고,
곧바로 동네 트레이더조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출시된 파스텔 컬러의 에코백을

사기 위해서였다. 작년 미니백 열풍 때, 리셀가가 100만 원을 넘겼다는 얘기를 듣고
“마트 가방에 유난스레 무슨 오픈런이야” 하며

신기해했다. 명품도 오픈런 하기 힘든데,

2.99달러짜리 가방이라니.

그런데 친구가 들고 다니던 앙증맞은 사이즈, 트레이더조 자수 로고가 박힌 그 가방이
자꾸 눈에 밟혔다. 그러다 올해 오픈 소식을 스레드에서 보고, 결국 주말에 남편을 끌고 가서
네 가지 컬러를 취향대로 골라왔다.

그런데 하필 조카가 딱 한 장만 산 민트색 가방을 찜해버렸다. (이 컬러는 동시에 엄마도 찜했다...)
결국 조카가 원한다니,

오늘 아침 또다시 마트에 전화를 걸게 됐다.

다른 지점은 품절이라 난리던데,
우리 동네는 감사하게도 재고가 있었다.
덕분에 또 한 번의 행운.

버스를 기다리다 그냥 걷기로 했다.
주말에 눈까지 내리며 끝날 줄 몰랐던 겨울이
오늘은 거짓말처럼 풀렸고,
골목마다 꽃봉오리가 눈에 띄었다.

걷다 보니 정말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가는 길엔 무척 스윗한 고양이도 만났다.
보자마자 내게 몸 인사를 해주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자, 집주인 할아버지가 나와

인사도 시켜주고 다른 고양이도 소개해주는 다정함에 마음이 몽글~ 몽글해졌다.

한참을 더 걸어 마트에 도착하니,
감사하게도 파스텔 미니백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낼름 카트에 몇 장 더 담았다.
라벤더 컬러가 가장 예뻤는데,

재고가 안 보여 당황했더니
직원이 남은 박스를 열어 찾아줬다.
얼마 남지 않은 라벤더 컬러를 겟!

조카 줄 가방, 부모님 드릴 작은 디저트류까지 챙기니
무게가 제법 묵직하게 나갔다.
집까지 걸어서 돌아가기엔 좀 벅차 보여서
중간에 카페인 수혈을 하기로 했다.





마트 근처, 가보고 싶던 카페에 갔더니
월요일 오전인데도 만석.
결국 자리가 넉넉한 다른 카페에 들어섰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혼자 스타벅스 가서
“Flat white”를 주문했다가 직원이 못 알아들었던

기억이 났다.
센스 없는 직원과,

화이트 발음을 촌스럽게 한국식으로만 구사하던

내가 만들어낸 실패.
그 후로는 주로 어플로만 주문했다...^^

그런데 오늘은 "플랫 와이트~"라고 당당히 시도했다.
이제는 발음도 제법 알아듣게 되나 싶어 괜히 뿌듯했다. 참 별거 아닌 일인데, 그땐 왜 그렇게

내가 작아졌을까 싶다.
고소한 플랫화이트를 기분 좋게 한 모금씩 삼켰다.

돌아오는 길엔 단골 USPS 지점에 들렀다.
여기 직원 아저씨는 한국 드라마 빅팬.
오늘은 “만다린 드라마~”를 외치셨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는데,
바로 요즘 화제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얘기였다.

영문 제목은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귤(만다린)을 활용한 제목으로,
영어 속담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를 제주 분위기에 맞게 바꾼 센스 있는 표현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완전 속았다”가 아니라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따뜻한 뜻이다.

그 의미를 설명해드리자 아저씨는
“Beautiful phrase!”라며 감탄했고,
한국인의 정서가 너무 따뜻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단다. 그는 퇴근 후 한국 드라마 보는 게
요즘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나도 괜히 행복이 전염됐다.

꼭 가까운 관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
이렇게 오가며 마주치는 가벼운 관계 속에서도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나저나, USPS에서 짐 무게를 재고 가격을 확인해보니 충격적이었다.
가방과 초콜릿값은 64달러인데,
국제배송비는 무려 117달러...배보다 배꼽이!

아저씨도 너무 비싸다며,
“UPS 가서 다시 견적 내보라”고 조언해주셨다.

그 말 믿고 무거운 짐을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한국에 택배를 좀 더 저렴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도 찾아냈다.

이제 이 작은 선물들은 나 대신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향할 예정이다.

내가 보낸 이 작은 마음이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삶의 작은 여행의 한 조각처럼
가볍고 즐겁게 닿았으면 좋겠다.

내가 머무는 이 일상을 여행처럼 바라보니,
모든 순간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웃어 넘길 수 있었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즐거웠던 하루였다.


삶은 여행이다. 요즘 난 더더욱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야 무거운 일도
가볍게, 거뜬히,
척척, 즐거이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