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잠잠히 돌이켜보는 11월의 소소한 생각기록
이렇게나 빨리 훌쩍 사라졌을까.
미국에서의 11월은,
내가 살아온 한국에서의 12월만큼이나
숨 가쁜 계절이었다.
미국의 큰 명절, Thanksgiving Day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시골에 살 때에는 한인 수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약속을 더더욱 의도적으로 최소화했기에,
땡스기빙 모임이 많아야 한두 번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보스턴에서 맞이한 두 번째 땡스기빙 파티는,
무려 네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땡스기빙 데이는 매년 11월의 네 번째 주 목요일이다.
특별히 이번 나의 땡스기빙은
11월의 세 번째 주부터 시작되었다.
첫 번째 파티는 미국인 선생님이 초대해 준 자리였다.
우리의 파티는 여느 땡스기빙과는 달랐다.
우선, 영어 선생님 중 한 분은 고기를 전혀 드시지 않았기 때문에 칠면조 요리를 생략했고,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이 모였기에 각자의 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음식을 준비해 오기로 했다.
덕분에 메뉴의 다양성은 자연스럽게 확보되었다.
넷플릭스 열풍으로 한국 문화에
익숙해진 친구들의 기대 속에서
나는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선생님 댁에서 열렸던 팟럭 파티(“Potluck Party”; 각자가 음식을 준비해 와서 나누는 파티)에는 부추어묵 잡채를 만들어 갔었다.)
그때 고기를 먹지 않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위해
어묵으로 대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특히 선생님 중 한 분은 **페스코테리언(Pescatarian; 생선과 해산물은 먹지만 육류는 먹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이 점을 고려해 메뉴를 준비했었다.
친구들 모두가 매운 음식과
김치에 대해 궁금해했기 때문에
이번에 "김치 부침개"로 결정해 만들어 갔다.
감사히 다행히도 넉넉히 만들어 간 김치 부침개가 모두 순식간에 소진되었다.
그리고 메인 선생님인 Sarah와는 달리, 조금 더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분으로만
알았던 Kathy 선생님이 직접 정성 다해 준비한 펌킨 케이크에 감동을 받았다.
미국 땡스기빙의 전형적인 메뉴 중 하나이지만, 사 먹어 본 경험 말곤 없다.
케씨는 우리에게 자신의 어릴 적 땡스기빙 추억의
따뜻한 조각과 마음을 나눠준 것이다.
올해는 내가 알고 이해한다고 확신했던 것들이
얼마나 가볍고 부질없는지 배워가는 한 해였다.
그래서 이제는 "다 안다"거나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삶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자각을 매 순간 하며, 겸손한 마음과 열린 자세로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두 번째 파티는 홍콩 이모 댁에서 열렸다. (열렸다는 표현이 맞다. 그날은 축제가 열린 셈이었으니)
"친정처럼 생각하라"라고 늘 따뜻하게
말씀해 주시는 이모 덕분에
보스턴은 내게 더 친근한 곳이 되었고,
정말 정을 붙일 수 있는 동네가 되었다.
이모가 보여준 넘치는 사랑과 마음은 내가 알던 사회관계 속 사랑과는 조금 달랐다.
이유가 없는 그저 따뜻한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받으며, 나 또한 이 사랑을 누군가에게 흘려보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유도, 조건도 없이 받은 이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하면, 나도 누군가를
더 따뜻한 태도로, 바라보고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 번째는 교회의 순모임에서
따뜻한 마음을 나눈 시간이었다.
올해 어려움을 겪어 발걸음이 쉽지 않았던 한 가족도 오래간만에 볼 수 있어 반가웠다.
나 또한 아플 때 동굴 속으로 숨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용기 낸 발걸음이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조용히 내 자리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인 거라고,
기도만이 우리의 유일무이한 해결의 옵션임을
깨닫기도 했다.
네 번째는 영화 같은 집에서 보낸 영화 같은 하루였다. 땡스기빙이 한 주 지난 후였기에, 칠면조는 슬라이스로 대체되어 사려 깊은 방식으로 아름답게 내어졌다.
밤새 준비한 음식들과 정성스러운 플레이팅에
깊이 감동했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 이런 정성을 쏟고 환대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 나의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특별한 바운더리 밖에는 큰 관심도, 다정함도 부족했던 내가, 올해는 뜻밖의 선물 같은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더욱 다정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구나.
그리고 그 사랑은 때론 가족이나 친한 친구도 아닌,
완전히 완벽히 낯설고 먼 존재로부터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어디선가, 최화정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 자기를 미워할 때 너무 힘들어하지 마.
누군가는 이유 없이 널 사랑해주기도 하니까,
그걸로 퉁 쳐~“
생각해 보니, 이 말은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였다.
이유 없는 고통과 아픔의 시간들 속에서
억울하고 분할 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내 삶 속에는
늘 이유 없이 사랑을 주는 이들이,
아무 때에나 찾아와 주었다.
이제는 나 또한 누군가에게 넉넉한 마음을,
온기를 나누며 살고 싶다는 생각과 결심이 든다.
올해를 돌아보는 나만의 작디작은 섬안에
조용히 머물며- 오래간만에 생각과
일정을 정리해 보니
이 모든 것들이 더 감격스럽게 느껴진다.
멈춰야 할 때,
달려야 할 때,
쉬어가야 할 때,
그리고 돌아봐야 할 때.
이 "때"를 깊이 있게 헤아리며 살아가고 싶다.
11월을 잘 보냈으니,
12월은 조금 더 잔잔히 보내 보고 싶다.
한 해를 돌아보며,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매일의 자연의 섭리 가운데
살아 숨 쉴 수 있음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올 한 해의 끝자락 한 올 한 올을 감상하며
보내봐야겠다는 생각에 잠겨본다.
오늘도 내일도, 그런 하루와 그런 사람이 되어 살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