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테러의 지형

by 도시관측소
땅은 아무리 사소한 흔적이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베를린까지 가는 길은 직항편이 없다.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긴 여정이다. 이코노미석에 구겨 넣었던 몸을 이끌고 미테 지역에 있는 숙소로 간다. 마침내 도착해 짐을 풀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베를린 도심을 둘러본다.


“Straßensperrung verursacht durch die Schandmauer (수치의 장벽으로 인한 도로 폐쇄)”


1960년대 서독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수치의 장벽'으로 불렀다. 장벽이 자유를 억압하고 동독 주민을 가두는 비인도적 구조물이자 동독 정권의 실패를 상징한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동독 정부는 '반파시스트 방벽 (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 말한다. 서방의 파시스트 세력과 자본주의 타락으로부터 사회주의 국가를 보호하는 벽이란 뜻이다. 같은 공간이라도 체제와 입장에 따라 보는 법이 크게 다르다.


동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과 ‘체크포인트 찰리’를 지나면 커다란 공터가 펼쳐진다. 무엇을 위한 공간일까? 장벽 뒤쪽으로 들어가니 땅속으로 파인 참호 같은 통로가 나온다. 여기서 하늘을 향해 빛이 스며 나오고 전시물이 눈에 띈다. 그 너머로 유리벽과 금속 메쉬로 마감된 나지막한 건물이 보인다. 바로 나치 정권의 폭력 시스템을 기록한 야외 전시장과 자료관 <테러의 지형(Topography of Terror)>이다.


20251014_194240.jpg 밤에 본 테러의 지형. 좌측이 참호 같은 야외 전시장이고 우측이 자료관


니더키르히너 거리 8번지에 자리 잡은 이 터는 과거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와 'SS(나치 친위대)', '국가보안본부(RSHA)'가 있던 자리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 후 반나치 인사에 대한 탄압과 강제 노역, 홀로코스트 범죄가 이곳에서 계획되고 또 지시되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고문과 학살이 자행된, 이름 그대로 “공포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1938년 나치 독일이 벌인 작전 중 하나가 '아크치온 아르바이트쇼이 라이히(Aktion Arbeitsscheu Reich)'다. 이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arbeitsscheu)"와 "비사회적인 자(asocial)”로 규정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하고 체포했던 작전이다. 여기서 ‘비사회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들은 예는 이렇다.


노숙자 및 걸인

알코올 의존자 및 약물 중독자

성매매 종사자

전과자

집시

징집 기피자 또는 평화주의자

만성 실업자 또는 잦은 이직자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거나 약간의 사회적 관심으로 얼마든지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치의 판단은 달랐다. 독일 민족의 순수함과 생산성을 저해하는 기생적인 존재라고 선전한 것이다. 비사회적인 자들의 검열과 체포에 투입된 조직이 바로 비밀경찰 게슈타포다. 체포 작전을 통해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재판도 없이 격리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러한 내부 숙청은 히틀러가 1939년 선언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존 공간)'의 핵심 축이었다. 위대한 독일 제국 건설이라는 명분 아래 외부 영토 확장을 외치면서,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인종적 순수성과 사회적 유용성을 기준으로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었다. 더 넓은 공간을 만들겠다며 수많은 독일 시민을 제거하는 이 잔혹한 행위는, 나치의 왜곡된 논리 속에서 '정화된 공간'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여겨졌다. 내재적 모순이다.


땅은 아무리 사소한 흔적이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하물며 모순적 구호와 폭력을 장착한 국가가 시민을 박해한 현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테러의 기억은 한동안 폐허 속에 깊이 묻히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군의 폭격으로 이 일대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후에도 터는 복원되지 않았고, 1961년 경계를 따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더 고립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땅은 점차 '망각의 지형'이 되었다. 나치의 범죄 현장이자 전쟁의 폐허, 그리고 냉전의 경계라는 층위가 뒤섞인 채 말이다.


이러한 집단 망각에 맞서 변화를 이끈 것은 시민들이었다. 1985년 전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이 장소의 의미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부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1987년, 현장에서 나치의 참상을 알리는 임시 야외 전시가 열리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2010년, 건축가 우르술라 빌름스와 조경가 하인츠 할만의 설계로 지금의 공간이 완성되었다.


이곳은 일반적인 추모 공간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희생자의 이름을 새기거나 넋을 기리는 상징물을 세우는 대신, 가해자들이 구축한 폭력의 시스템을 해부하는 데 집중한다. 공간 전체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계획되었다.


_1.jpg


우선 건축가는 파괴된 건물을 복원하는 대신, 발굴된 게슈타포 본부의 지하 감옥 및 고문실의 잔해를 ‘범죄의 증거’로 노출시켰다. 붉은 벽돌과 허물어진 벽의 단면은 이곳이 단순한 폐허가 아니라, 끔찍한 국가 범죄가 조직적으로 자행된 행정기관의 토대였음을 보여주는 현대적 유물이다.


관람객은 도시의 지면에서 한 단 아래로 내려가, 마치 발굴 현장이자 전쟁터 참호처럼 조성된 길을 따라 걷게 된다. 바닥에 깔린 회색 자갈은 걸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편한 감촉을 전달한다. 관람객이 별생각 없이 걸으며 역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의도일 것이다.


길을 따라 설치된 전시 패널에는 희생자들의 슬픈 이야기보다는, 나치 친위대와 비밀경찰의 조직도, 주요 인물들의 사진,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시민들을 감시하고 학살에 이르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 자료가 나열되어 있다. 이는 감정적 위로가 아닌, 테러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분석하게 만든다.



20251014_195017.jpg


야외 전시장을 감싸는 자료관 건물 역시 의도적으로 장식성을 배제했다. 거대한 기념비가 아닌, 낮고 수평적인 형태의 차가운 입면은 마치 사실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브’처럼 보인다.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가해의 진실을 배우고 교훈을 얻는 장소에 더 가깝다.


<테러의 지형>은 파괴된 가해의 현장을 보존하고, 불편한 동선을 통해 관람객을 그 시스템의 중심으로 이끌며 방대한 자료를 통해 폭력의 구조를 직시하게 만든다. 슬픔을 넘어선 이해와 성찰이 이 공간이 우리에게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다.



* 이 글은 2025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4화여든의 물구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