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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의 물구나무

by 도시관측소
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신체 활동이다. 운동은 자신을 위해 투자한 종목 중 단연 최고의 수익률을 제공한다.

- 산제이 굽타 (Sanjay Gupta)



두좌법(頭坐法)이라는 자세가 있습니다. 머리와 양손바닥을 삼각형으로 땅에 대고 몸을 거꾸로 세우는, 이름 그대로 '머리로 서는' 물구나무서기 자세죠. 웬만한 청년도 하기 어려운 이 자세를 매일 10분씩 해내는 여든의 노인이 있습니다. 바로 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지난 23년간 거의 빠짐없이 매일 새벽 같은 국선도장으로 향합니다. 수련의 시작은 아침 6시 반. 이른 시간 지하철을 타야 하는 게 번거로울 법도 한데, 지난 2년 동안 수술로 무리한 동작을 피했던 날을 포함하여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2000년 4월, 한 문화센터 5층에 문을 연 이 도장은 어느덧 삼십 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울 카페의 평균 수명이 불과 3년 남짓인 시대에 이룬 작은 도장의 비범한 지속성입니다. 아버지처럼 20년 넘게 다닌 어르신이 세 분 더 계시고, 지금은 60대가 된 사범님은 처음부터 줄곧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개인의 꾸준한 성장이라는 퍼즐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은 신뢰할 수 있는 공간의 존재입니다.


이른 아침의 수련이 주는 긍정적 자극은 사실 전날 밤, ‘내일 아침에 가야지’라는 다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좋은 컨디션으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숙면 환경을 조성하는 것부터가 이미 수련의 일부인 셈입니다. 모든 위대함은 작은 다짐과 실천에서 나옵니다.


도장에 모인 사람들은 처음부터 몸을 강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매트 위에서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명상과 호흡으로 밤새 잠들어 있던 뇌신경을 서서히 깨웁니다. 수련이 시작되면 익숙한 동작부터 반복하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소 복잡한 동작을 새로 배웁니다. 이렇게 작은 움직임부터 새로운 학습이 필요한 자세까지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는 과정 자체가 훌륭한 인지 훈련이 됩니다.


국선도 수련은 새로운 경험과 익숙한 반복이라는 두 가지 뇌 자극을 모두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경험은 뇌세포 생성을 촉진하고, 반복 경험은 기존의 신경망을 더 굳건하게 만듭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정체기가 찾아올 때쯤이면, 사범은 회원들의 상태를 살피며 더 복잡한 자세에 도전하게 하거나 유산소, 균형, 근력, 호흡 등 수련 방식에 변화를 줍니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승단 심사는 성취감을 안겨주고, 승단 후 주어지는 새로운 과제는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을 도전의 계기가 됩니다.


운동을 하며 이어진 관계는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삶에 활력을 주는 다른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곤 합니다. 회원 중 한 분인 역사 선생님과 함께 고궁을 탐방하고, 한 달에 한두 번 사범님과 차를 마시는 식입니다. 과도한 참여 의무나 의사결정 부담이 없는 느슨하지만 따뜻한 유대감은 그 자체로 편안함을 줍니다. 이는 결국 공간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집니다.


몸과 뇌에 건강한 자극을 주는 환경이라도 그 문턱이 높다면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환경 노년학(Environmental Gerontology)의 '역량-환경 압력 모델’은 개인의 역량과 환경의 요구(압력)가 조화를 이룰 때 성공적인 노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노년기에는 신체적, 인지적 역량이 자연스레 감소하므로, 참여에 필요한 환경의 압력을 낮추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다니는 도장은 그 원리를 충실히 따릅니다.


낮은 진입 장벽: 월 3만 원의 저렴한 이용료와 주민센터라는 편리한 접근성

자율적 역할 분담: 회원들이 돌아가며 매트를 깔고, 출석 체크는 오랜 기간 아버지가 도맡아 함. 회원의 나이가 80세가 넘으면 매트 정리 역할에서 면제해 주는 작은 배려

예측 가능한 편안함: 늘 같은 수련 과정과 익숙한 환경, 편안한 사람들은 불필요한 선택에 드는 정신적 에너지를 아껴주어 수련 자체에 집중하게 함


여기에 아버지가 사용하시는 '손목닥터 9988' 앱은 또 다른 동기를 더합니다. 하루 8천 보를 걸으면 쌓이는 포인트는 주변 상점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장 출석’이라는 사회적 목적이 ‘출석 체크와 매트 정리’라는 구체적인 역할, 그리고 ‘포인트’라는 작지만 확실한 보상과 결합하면서 신체 활동의 동기는 더욱 강력해지고 지속 가능해집니다.


30년을 향해 가는 국선도장의 지치지 않는 생명력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작은 지혜들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몸과 두뇌를 깨우는 적절한 자극을 꾸준히 제공하되,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환경의 요구를 조율하는 세심함. 이것이야말로 여든의 노인이 매일 새벽 물구나무를 서게 하는 힘이자, 평범한 공간을 비범하게 지속하게끔 하는 버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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