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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꽃집

by 도시관측소

해방촌에는 무언가를 사거나 파는 일 모두에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이 서려 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서도 한참을 걸어 언덕을 오르내려야 하고, 좁은 골목길은 차 한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라 주차는 늘 골칫거리다. 이태원과 맞닿아 있지만 그 번화함이 언덕 너머로 미치지는 못해, 좀처럼 유동인구가 몰려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손님들의 발길이 뜸한 날도 부지기수고 이웃 가게들 역시 예고 없이 문을 닫기 일쑤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것은 어쩌면 장사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다르다는 뜻일지 모른다. 손님이 뜸한 시간, 가게의 여백은 주인의 시간이 스며드는 장소가 된다. 그러다 보면 가게는 주인의 뜻을 닮아가고, 생계를 위한 일과 마음이 향하는 일 사이의 경계가 자연스레 허물어진다.


작년 겨울, 나는 해방촌을 찾았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남아 골목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한 꽃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연말이 가까워진 터라 꽃다발 하나쯤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내부는 주인이 혼자 가꾸기에 알맞을 만큼 아담했다. 폭은 겨우 3미터나 될까. 안으로는 꽃 소재와 다발을 꾸밀 소품들이 쌓여 있었다.


주문을 마치고 서서 기다리는 내게, 사장님은 무심한 투로 툭, 말을 건넸다. 위층으로 한번 올라가 보라는 손짓과 함께.


“위층이요?”


도대체 위층에 뭐가 있길래 올라가 보라는 걸까. 그가 가리킨 좁다란 회전 계단에 발을 디뎠다. 계단 폭이 너무 좁아 몸을 웅크려야 했다. 가게에 딸린 공간이니 꽃 자재나 샘플이 쌓여 있지 않을까. 아니면 주인의 쉼터일 수도 있겠다.


계단을 한 바퀴 반쯤 돌아 2층에 도착하자 분주한 아래층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깨끗하게 정리된 바닥과 새하얀 벽, 그리고 그 벽을 비추는 조명 아래 몇 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바닥에는 오렌지 자스민과 소엽 맥문동 화분이 네댓 개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여기…뭐 하는 데야?”


마치 비밀스러운 갤러리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벽에 걸린 사진에는 거대한 나무가 선 들판과 안개 낀 호숫가의 실루엣이 사람의 형체와 함께 담겨 있었다. 아마도 자연의 원초적인 감성과 이를 마주한 인간의 관계를 렌즈로 포착한 작품인 듯했다. 꽃집에 이런 사진 작품 전시라니, 궁금증이 한층 커졌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공간에 관한 궁금함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는 원래부터 꽃이 아닌, 자연과 사람을 예술적 구도로 바라보는 일에 더 마음이 갔다고 했다. 운 좋게 해방촌 언덕에 자리를 얻었고 생계를 위해 꽃을 팔기 시작했다. 2층에서는 마음 맞는 사진작가나 예술가 지망생들과 작은 전시를 열거나 사진 촬영법을 나누기도 한단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꽃집은 생계를 위한 루틴이고, 갤러리는 쭉 해오고 싶었던 일을 펼치기 위한 몰입과 실험의 장소다.


정해진 룰은 없다. 대중에게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고 싶은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시를 하다 작업실로 쓰고 다시 사진 도구를 점검하는 가변성 높은 공간이기도 하다.


나같이 처음 온 손님이 2층의 존재를 알 턱이 없다. 간판 하나 없을뿐더러, 영업장을 가로질러 좁은 회전 계단을 오를 마음을 먹기란 쉽지 않다. 결국 2층은 주인의 초대를 받아야만 비로소 엿볼 수 있는 한정판 갤러리이자, 취향이 맞는 이들이 모여 예술에 대한 감도 높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적 성장의 공간인 셈이다. 꽃을 파는 영업 활동에는 별 도움이 안될, 비경제적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의 주인은 우리 사회가 규정하는 ‘꽃집 사장님’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았다.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는 꽃을 팔고 사진을 찍고 예술품을 전시하는 그만의 실존으로 공간에 특색을 불어넣고 있다. 꽃집은 무릇 이래야 한다는 본래 역할이 그리 중요하진 않은 것이다.


그의 업(業)은 단순한 돈벌이를 넘어, 소박한 공간을 유지하며 자아를 확장하는 일이다. 그 수고스러움을 온전히 감당하며, 그는 공간과 함께 한 발씩 나아간다.



* 이 글은 2025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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