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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비싼 도시는 성장을 멈추게 한다

생존의 도시에서 고액 생존 멤버십에 가입한 사람들

by 도시관측소


그 시절, 만만한 공간이 허락했던 자유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던가요. 모든 게 불안정했던 20대 초반을 떠올리면, 궁핍했지만 이상하게도 자유롭고 충만했던 기억이 먼저 듭니다. 건축학도였던 저는 매일 도시와 건축을 논하고, 마음을 뺏긴 집의 도면을 펴놓고 1:100 스케일 모형을 깎았습니다. 밤늦게 맥주병을 쌓아놓고 친구들과 세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도, 금세 서로의 관점과 꿈을 긍정해주던 소중한 시간이었죠.


분명 저는 그 시간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 성장의 무대는 화려한 랜드마크 속이나 도슨트 건축 투어가 아닌, 서울대입구 관악프라자 뒷골목에 있던 허름한 ‘작업실’이었습니다.


작업실의 이름은 <야광별>이었습니다. 전 세입자가 벽 곳곳에 야광 스티커를 붙여놓은 게 그대로 이름이 되었죠. 장마철이면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벽을 타고 내려왔고, 한겨울에는 입김이 나올 만큼 추워 석유난로를 켜야 겨우 언 손가락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작업실 한 친구의 테러로 변기는 수시로 막혔고, 보드를 대충 깔아 만든 잠자리 아래에서는 바퀴벌레가 자주 출몰했습니다. 유독 벌레를 싫어하는 저로서는 꽤나 고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한 달 월세 30만 원, 그마저도 열 명이 나눠 냈기에 그곳에서 버티며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이 투박한 공간이 저의 성장을 지탱해 준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밤새도록 배우고 토론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 머무는 대가가 저를 옥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머니 얇은 대학생이 감당할 수 있었던 그 만만한 공간 덕분에 저는 시간을 충분히 쓰면서 꿈을 키워갔습니다. 물론 회식비와 월세 지불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늘려야 했지만, 치열한 하루를 보내며 진짜 내 일과 관심사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만만한 공간이 허락했던 드문 자유였죠.



요즘 도시, 생존 멤버십의 비싼 청구서


이제 2025년의 서울로 시계를 돌려봅니다. 도시학에서는 흔히 ‘살기 좋은 도시(Livable City)’를 지향점으로 꼽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는 대학원 연구실에서도 여러 학생들이 이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죠. 살기 좋은 도시란 쾌적한 환경, 문화적 풍요, 높은 삶의 질과 양질의 일자리가 보장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서울, 그리고 세계의 슈퍼스타 도시들은 이 단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존 가능성(Survivability)’이라는 척도가 그곳의 일상을 더 정확히 포착합니다.


서울은 분명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골목마다 힙한 상권이 들어서 있고, 월드 클래스 수준의 전시와 공연이 일 년 내내 펼쳐집니다. 하지만 그 뒤편에서, 서울은 구성원들에게 가혹한 청구서를 내밀고 있습니다. 집값, 물가, 사교육비, 의료비까지 모든 비용이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청년과 1인 가구, 심지어 중산층 가장들에게도 서울은 삶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고단함을 무릅쓰고 버티며 살아남아야 하는(survivable) 전장(戰場)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람들이 이런 비용을 치르며 버티는 이유는 한 가지로 압축됩니다. 서울이 가진 압도적인 경제적 기회, 농축된 경험의 밀도,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소셜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것을 ‘고액의 생존 멤버십’이라 부릅니다. 마치 멤버십을 유지하지 못하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 탈퇴하는 순간 남은 기회마저 박탈당할 것 같은 도시가 지금의 서울입니다. 이 불안이 청년과 기업들을 서울이라는 좁고 비싼 링 위로 끊임없이 밀어 넣습니다.


문제는 이 멤버십 비용이 감당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의 성장 본능이 꺼진다는 점입니다. 전월세와 생활비가 목 끝까지 차오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성장 모드를 끄고 생존 모드로 전환합니다. 미래를 위해 불확실한 모험을 하거나,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을 돌보고, 당장 돈이 안 되는 배움에 투자하거나, 실패할지도 모를 일에 도전하는 일은 나의 선택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대신 살아남기 위해 가장 보수적이고 안전한 길만을 고르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주식과 코인 투자로 대박을 좇게 됩니다. 그들이 속물이라서가 아닙니다. 생존이 목표가 된 삶에서 나를 성장시키는 장기 투자는 유예되기 쉽고, 남들이 걷지 않은 모험의 길은 절대 먼저 걷지 않습니다. 대신 여윳돈을 짜내어 유동성 증가라는 트렌드에 하루빨리 올라타기 위해 단기 투자에 몰두하게 됩니다.



분노하는 세계의 청년들 : 탈출하거나, 파괴하거나


이러한 비극은 비단 서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2025년 현재, 전 세계의 대도시는 거대한 화약고입니다. 런던, 파리, 뉴욕,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 이르기까지, 감당 불가능한 주거비와 살인적인 물가, 기득권의 비리는 청년들을 분노의 절벽으로 내몰았습니다.


‘제너레이션 렌트(Generation Rent)’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내 집을 갖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 평생 세 들어 살아야 하는 젊은 세대를 의미하는 자조 섞인 단어입니다. 높은 주택 가격과 불안정한 고용, 엄격한 대출 규제로 부모 찬스 없이는 자가 소유와 자산 축적의 사다리 모두가 걷어 차인 사람들의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과거 전월세는 임차 가구가 자가 소유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살고 있는 집에 대한 '강제 저축' 기능으로 결국 자산 증식의 발판이 되었죠. 하지만 제너레이션 렌트에게 임차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함정입니다. 매월 벌어들이는 소득의 30% 이상을 월세로 지출하느라 저축이나 투자도 어렵고, 임대 계약이 끝날 때쯤 더 높은 전월세를 감당해야 합니다. 결국 소득 상승분은 금세 휘발되어 버려 자산 격차가 영구화됩니다. 호주의 시드니나 멜버른에서는 "Locked out (문밖으로 쫓겨난)" 세대,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Rent burdened (임대료 과부하)" 세대라고도 합니다.


참다못한 청년들의 좌절은 이제 한숨을 넘어 맹렬한 분노로, 때로는 파괴적인 형태로 폭발하고 있습니다. 케냐의 나이로비, 방글라데시의 다카,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영국의 런던, 포르투갈 리스본, 프랑스 파리, 우간다의 캄팔라, 조지아의 트빌리시, 네팔 카트만두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죠. 이들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국경을 넘거나’ 아니면 ‘정부 체제를 들이받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네팔의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매일 2천 명이 넘는 청년들이 나라를 떠나는, 슬픈 이별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수도 카트만두의 생활비가 현지 임금으로는 수십 년 모아도 감당할 수 없기에, 그들은 "내 나라의 수도에서 굶느니, 차라리 남의 나라 하층민으로 돈을 벌겠다"며 짐을 쌉니다. 도시가 청년의 성장을 돕기는커녕, 비자발적 인력 송출 기지로 전락한 모습입니다.


떠나지 못한 이들의 절망은 도시 내부에서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구호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는 더 잃을 것이 없다" (케냐)

"능력이 아닌 혈통이 지배하는 사회를 해체하자" (방글라데시)

"배고픔에는 이념이 없다. '분노의 날' 다 같이 모이자" (라고스)

"밀레이 정권의 전기톱은 결국 내 삶을 잘라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관광객이 아닌 우리에게 살 집을 달라" (리스본)

"청구서를 불태워라" (이슬라마바드)

"부패를 멈춰라(#StopCorruption)" (우간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정치인의 부패, 과도한 세금, 불안한 일자리 등 제각각이지만, 기저에 깔린 진짜 뇌관은 도시에서의 생존 불가능성에 대한 깊은 좌절과 분노입니다. 낡은 집의 월세와 아이들 음식값도 내기 버거운 현실에서, 권력을 대물림하며 화려한 성채 안에 사는 정치인과 기득권을 향한 적개심이 누구보다 '공정'에 예민한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나의 가난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가진 자들만 도시에서 살아남도록 설계된 고액 멤버십 카르텔 때문이다."

내가 발 딛고 선 도시가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하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나의 인간성을 착취하는 기계처럼 느껴질 때, 평범한 시민들은 난민이 되거나 괴물로 변합니다. 어느 글에서 읽은 내용인데, 원래 한 곳에 괴물이 나타나면 그로 말미암아 괴물처럼 변한 자들이 들끓는 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사 괴물이 다른 괴물을 습격하는 도시는 아무리 화려한 인프라를 갖췄더라도 갈등이 고조되며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캐리 브래드쇼 지수와 서울의 잔인한 숫자들


이러한 주거비 공포를 통계적으로 잘 보여주는 지표가 있습니다. 바로 <이코노미스트>지가 발표하는 ‘캐리 브래드쇼 지수(Carrie Bradshaw Index)’입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전 세계를 강타했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를 기억하시나요?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는 신문 칼럼니스트로 일하며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살며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깁니다. 이 지수는 “평범한 직장인이 가장 기본적인 스튜디오(원룸) 아파트에 살기 위해 매달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를 따졌습니다.


주거비가 ‘감당 가능하다(Affordable)’고 할 때의 기준은 통상 월 소득의 30% 이하입니다. 예를 들어, 세후 월급이 300만 원이라면 월세로 90만 원 이상을 쓰면 안 된다는 뜻이죠. 그 이상을 쓰면 저축은커녕 다른 필수 생활비조차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30% 룰을 적용해 미국 주요 도시의 적정 소득을 계산했습니다.


2024~25년 기준, 뉴욕에서 평범한 스튜디오 하나를 빌려 캐리처럼 혼자 살려면 연봉이 최소 14만 달러(현재 환율로 약 2억 원)는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뉴욕의 중위 소득은 그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드라마 속 캐리가 지금 뉴욕에 산다면, 그녀는 맨해튼 아파트가 아니라 퀸즈의 낡은 셰어하우스에서 화장실을 공유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슈퍼스타 도시’를 넘어 중소 도시로까지 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로 인기를 끌었던 텍사스의 오스틴이나 테네시의 멤피스 같은 도시들마저 최근 월세가 급등했습니다. 이 지역의 평균 급여로는 더 이상 독립된 주거 공간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죠. 미국 전역에서 ‘나 혼자 산다’는 꿈은 이제 고소득 전문직만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호주 역시 심각한 주거비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시드니나 멜버른 같은 대도시의 임대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입니다. 호주의 평범한 사회초년생이 감당할 수 있는 월세 매물은 씨가 말랐고, 수십 명이 집 한 채를 두고 입장 경쟁을 하는 오픈 하우스 풍경이 뉴스에 등장합니다. 소득은 제자리인데 집값만 미친 듯이 오르는 이 현상 앞에서, 청년들은 독립을 포기하고 다시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거나(캥거루족),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서울의 주택 구입 상황은 어떨까요? 전 세계 도시 통계 사이트 ‘넘베오(Numbeo)’에 따르면 서울의 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PIR)은 25 입니다. 25년 치 월급을 모아야 비로소 집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1]. 뉴욕은 11 로 서울이 두 배 이상 높습니다. 소득은 뉴욕보다 낮은데, 집값과 체감 주거비 부담은 뉴욕을 상회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단함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닙니다. 이 잔인한 숫자들이 증명하듯, 우리는 소득의 너무 많은 부분을 단지 ‘존재하는 비용’으로 지불하고 있습니다.



필터 아웃(Filter-out): 젊음과 혁신이 떠나간 자리


도시가 비싸지면 사람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의 미래인 혁신도 함께 짐을 쌉니다. <도시 관측소>에서는 이를 필터 아웃(Filter-out)이라 명명했습니다. 마치 거대한 체로 거르듯, 높은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대기업이나 소비자 혹은 발주처와 긴밀한 접촉이 필요한 기업만 남고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던 재능 있는 예술가, 엉뚱한 창업가, 패기 넘치는 사회초년생은 밖으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우리에게 섬뜩한 예고편입니다. 혁신의 심장부였던 실리콘밸리는 살인적인 주거비와 물가 탓에 테슬라, 오라클 같은 거대 기업마저 텍사스로 떠나보냈습니다. 중산층과 스타트업이 떠난 도심은 텅 비었고, 그 자리를 노숙자와 마약, 범죄가 채우고 있습니다. 다양성이 사라진 도시는 혁신의 동력을 잃고, 그들만의 비싼 성벽 안에 갇혀 서서히 질식해 갑니다. 이것이 바로 화려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독이 든 성배’입니다.


서울 역시 위험합니다. 특히 필터 아웃은 서울 시민만이 아닌 외국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외국인들이 보는 서울은 ‘놀러 오고 싶은 도시’일지언정 ‘일하며 사는 비용을 기꺼이 감당하고 싶은 도시’는 아닙니다. K-컬처는 매력적이지만, 우리의 비즈니스 환경은 고립된 섬과 같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면 동남아 전체로 시장을 확장할 수 있고, 파리나 리스본에서 회사를 열면 유럽 인재 전체를 잠재적 인력풀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주변의 나라들은 협력 파트너이자 동시에 주력 분야에서 사활을 건 경쟁자입니다. 시장의 확장성이나 인력풀 채용의 유연성이 지리적으로 막혀 있습니다.


동시에 서울의 주거비와 생활비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정작 외국 인재에게 주는 연봉 패키지는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게다가 최근의 치솟는 환율은 한국 돈을 버는 것에 대한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습니다. 규제 리스크도 큽니다. 정권에 따라 정책 기조가 급변하고, 각종 인증 절차나 기술 표준도 복잡합니다. 외국 기업과 인재가 와서 비즈니스로 성공하기엔 난이도가 아주 높은 도시가 지금의 서울입니다. K팝을 보러 오는 관광객은 많아도 K-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오는 해외 CEO들은 드문 게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깊이 좋아하되 위협받지 않는 도시를 향하여


당장 다음 달 월세가 오를까, 이 도시의 멤버십에서 강제 퇴출당하지 않을까 매일이 살얼음판인 상황에서 도시는 고단한 곳, 동네는 위험한 장소가 됩니다. 다시 20대 초의 저에게 '야광별' 작업실이 어떤 의미인지 떠올려 봤습니다. 지저분하고 좁았지만 적어도 그 공간은 배움의 밀도가 높으면서도 감당 불가능한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 위협받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쫓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었었죠.


사람들은 무언가를 깊이 좋아하되 부당한 위협을 느끼지 않는 상황에서 애초에 하려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룹니다. 내일의 최소한의 생존과 인간다움이 보장될 때, 우리는 비로소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온전히 투신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바삐 계산기를 두드리는 대신, 좋아하는 대상의 본질을 파고들게 됩니다. 위협 없는 몰입의 순간에 우리는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뤄내고,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제가 허름한 작업실에서 공간의 세계와 교류의 맛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반대로 너무 비싼 도시는 구성원을 끊임없이 위협합니다. 그럭저럭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 되어버릴 때, 사람들은 더 멀리 뛰는 게 아니라 당장 넘어지지 않게끔 몸을 웅크립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모든 근육을 멈춰 세우는 것이죠. 타인이나 세상과 공명하는 대신, 각자도생의 셸터로 숨어듭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도시는, 그리고 공간은,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프리미엄 멤버십이나 화려한 랜드마크가 아닙니다. 이런 건 차차 만들어가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여러 사람과 마주치고 생각을 나누되 실패가 용인되는 저렴한 작업실, 주머니 가벼운 청년도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동네, 생존을 넘어 공동체 삶의 큰 그림을 고민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필요합니다.


위협이 사라진 자리에서 좋아하는 마음은 나의 능력이 됩니다. 혁신도 이런 환경에서 꽃을 피우죠. 너무 비싼 도시는, 안타깝게도 이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

[1] 올해 11월 국토부가 발표한 서울의 PIR은 13.9 입니다. 자가 가구를 표본으로 조사했기 때문에 넘베오의 통계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이 글은 2025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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