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미래 제2의 코로나가 창궐한다면, 최초의 백신은 누가 만들까?
Written by 김세훈
만약 제2의 코로나가 다시 창궐한다면, 세계 최초의 백신은 어디에서 개발될까요? 지난 50년간 이어져 온 ‘보스턴형 성장’을 떠올려 보면, 제2의 코로나 백신도 역시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탄생할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럽습니다.
미국의 도시 '보스턴'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하버드와 MIT가 있는 대학도시. 아니면 매사추세츠주의 주도이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 보스턴에 진심인 제가 이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보스턴에서 첫 번째로 놀란 건 인구 대비 도시의 영향력입니다. 보스턴과 캠브리지를 합쳐도 인구가 80만 명 정도밖에 안됩니다. 서울의 송파구보다 약간 더 큰 규모죠. 하지만 이 작은 도시가 미국 역사와 도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합니다. 미국 최초의 제도, 시설, 기관을 만들었다는 타이틀을 여럿 갖고 있죠.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1. 미국 최초의 공립학교 (공교육의 시초) – 보스턴 라틴 스쿨(Boston Latin School, 1635)
2. 미국 최초의 공립 고등학교 (오늘날의 ‘고등학교’ 개념에 부합) – 보스턴 잉글리시 하이 스쿨(Boston English High School, 1821)
3. 미국 최초의 종합대학 –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1636)
4. 미국 최초의 지하철 – 트레몬트 스트리트 서브웨이(Tremont Street Subway, 1897)
5. 미국 최초의 공공도서관 – 보스턴 공공도서관(Boston Public Library, 1854)
6. 미국 최초의 공원 (미국 도시공원 중 가장 오래된 역사) –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 1634)
7. 미국 최초의 등대 – 보스턴 라이트(Boston Light, 1716)
8. 미국 최초의 공공 해변 – 리비어 비치(Revere Beach, 1896)
9. 미국 최초의 시 경찰 (현대적인 형태를 갖춘 미국 최초의 시(市) 경찰기관) – 보스턴 경찰청(Boston Police Department, 1838)
등이 있습니다. 만들어진지 아주 오래되었지만 이들 기관 혹은 시설은 지금까지도 그 기능을 다하고 있죠.
18세기 중반의 보스턴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 최초의 공립학교, 북미 최초의 현대적 공원인 보스턴 커먼, 미국 최초의 지하철과 공공도서관, 그리고 미국 최초의 종합대학인 하버드까지, 수많은 '최초'의 기록을 보유한 역사적 중심지였죠.
그러나 195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 인구가 80만 명에서 56만 명으로 급감하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섬유, 가죽, 기계, 선박제조와 같은 전통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쇠퇴했고, 일자리 부족과 경기 불황으로 중산층이 교외로 이탈했습니다. 이로 인해 도심 상권이 약화되고 빈 건물과 슬럼가가 늘어나며 도시는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보스턴과 캠브리지는 인구감소의 위협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포기하지 않고 차분히 도약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생명과학과 백신 개발 분야입니다.
1977년, 캠브리지는 세계 최초로 rDNA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돌연변이 발생이나 생태계 교란 등의 우려가 제기되었기에 미국 국립보건원 지침을 준수하고 일부 유형의 rDNA 연구는 제한하는 내용이 제도화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생물의 DNA를 결합하는 이 재조합 기술은 새로운 의약품 생산이나 농업 생산성 증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잠재력이 있었고, 이 결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 바이오젠과 화이트헤드 연구소 같은 기업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캠브리지는 바이오테크 연구와 신약 개발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2010년 캠브리지에 설립된 모더나는 기존 백신 개발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병원체의 정보를 mRNA라는 설계도로 만들어 우리 몸의 세포에 전달하고, 세포 스스로 항체를 생성하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이를 통해 백신 개발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대량 생산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설립된 지 불과 10년 만에 코로나19 초기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하여 수억 명의 인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공은 물론 기업 혼자 이룬 것이 아닙니다. 도시, 대학, 입법기관, 의료·연구기관이 함께 움직였기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도시 전체가 부를 창출하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죠.
인구 11만 8천 명 남짓한 작은 도시 캠브리지가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의 허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낡은 관념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도시 전체가 기술 혁신의 실험장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파격적으로 개선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유망한 기업들이 연구와 제품 개발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죠.
현재 이 지역에는 모더나와 함께 화이자, 얀센, 브로드 연구소, 노바티스 같은 백신 기업과 유전자·암 연구소, 보스턴 아동병원과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이 한데 모여 있으며, 18개의 글로벌 제약회사와 1,600여 개의 바이오테크 기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와 연계하여 하버드 대학교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버클리 음대, 노스이스턴대, 보스턴, 에머슨, 서포크, 터프츠, 웰즐리까지 수많은 대학이 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미국이 세계 백신과 치료제 시장의 약 40%를 장악하고, 글로벌 제약사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중 56%를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리 미국이 초강대국이어도 단일 분야가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죠.
이런 산업의 성장은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져, 보스턴의 관련 산업 구인 공고는 2010년 500여 개에서 2020년 2,300여 개, 2022년에는 4,100여 개로 급증했습니다. 전체 산업의 일자리도 2010년 54만 개에서 2023년 여름 68만 6천 개까지 늘어났으며, 그중에서 바이오·헬스(15만)와 전문기술 서비스업(10만) 일자리가 높은 비율로 1,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산업 생태계의 영향력은 해외 기업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한 예로 런던의 인공지능 항체 치료 기술 연구 기업인 알케맙의 경우, 보스턴의 생명공학 투자사 알에이캐피탈이 약 1,1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주도하면서 신규 인력 채용과 임원 구성에 보스턴 출신 인재들의 등용을 요구하는 등 글로벌 기업의 전략적 방향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MIT 주변의 켄달 스퀘어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1 스퀘어 마일"로 불리며, 1960년대 NASA 본부 이전을 위해 확보한 이 부지는 이후 민간 개발을 통해 혁신 기업들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이오 분야 스타트업의 성장을 위해 랩센트럴과 같은 인큐베이터가 설립되어, MIT의 건물 기부와 주 정부의 초기 시설비용 지원, 그리고 대형 제약사들의 스폰서 참여를 통해 초기 연구 시설과 각종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매년 4~5개 기업이 IPO에 성공하는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만약 제2의 코로나가 다시 창궐한다면, 세계 최초의 백신은 어디에서 개발될까요? 지난 50년간 이어져 온 ‘보스턴형 성장’을 떠올려 보면, 제2의 코로나 백신도 역시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탄생할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