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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Nov 07. 2024

36. 원한과 좌절 그리하여 르상티망

박민혁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웃라인 면회실에 도착했다. 드디어 스위스은행 계좌를 넘겨받는 것이다. 그의 당연한 권리, 상속권, 그렇게 당연한 걸 손에 넣기까지 지겹게 오래 걸렸다. 많은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효자는 아니라도 평범한 아들 정도는 충분히 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스위스은행 계좌를 꽉 쥐고 포에버월드로 가는 바람에 그가 나쁜 아들이 됐다. 자식을 못 믿는 노인네가 평범한 사람을 못 믿을 아들로 만든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그게 잘못이다.


클리닉에 지현우는 없었다. 새벽시간인데다가 오기 전에 주인호 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현우를 완전히 배제시켜달라고 요구했고 통화자체의 보안도 신청했다. 지극히 민감한 금융정보가 포함돼 있으므로.


야근하던 기술팀 엔지니어는 아웃라인 연결됐다는 신호를 보낸 뒤 면회실을 나갔다. 그가 완전히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박민혁은 박장우에게 말했다.


“자, 이제 결정하셨나요? 아버지.”

=그래, 조건은 두 가지다.


화낼 만도 한데 박장우의 목소리는 격앙되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겨우 두 가지요? 많이 소박해지셨네요.”

=첫 번째, 윤지호의 계약을 보장해. 그리고 그녀가 영면할 때까지 계약은 자동갱신되게 하고.


예상했던 조건이다. 수십 년 갱신한다면 제법 돈이 많이 들겠지만 그가 통화한 감으로 윤지호는 계약갱신을 거의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몇 번 갱신한다고 해서 못 할 것도 없다. 스위스은행에 있는 돈이 얼마인데..


“그거야 뭐. 알겠습니다. 두 번째는 요?”

=지호씨의 소설을 출판해 다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민혁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윤지호의 소설이라니.


“그 여자가 소설가였어요? 그것보다 포에버월드에서 소설을 썼다구요? 야, 이거 토픽감인데?”

=더 묻지 말고.. 바로 원고 보낼 테니, 꼭 소설책으로 나오게 해다오. 부탁이다. 


신기하긴 하지만 못 해줄 것도 없다. 


“저한테 부탁한다고 하니까 좀 감동입니다. 바로 보내세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뭔지 모르지만 나도 좀 읽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럼 이제 스위스은행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시죠.”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자 박장우는 선선히 스위스은행 계좌정보를 박민혁에게 넘겼다. 


“잠깐만요. 계좌확인 좀 해 볼게요.”


박민혁은 스마트폰 뱅킹으로 박장우의 스위스은행 계좌의 잔고를 확인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액수의 잔고가 스마트폰 화면에 찍혔다. ‘이 노인네, 이 돈을 다 어떻게 하려고..’


“확인했습니다. 더 할 말씀은 없어요?”

=없다.


박장우는 구차하게 ‘약속을 잘 지키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제 약속을 지키든 안 지키든 전부 박민혁에게 달린 것이다.


“제가 궁금해서 그런데요. 아버지는 그 여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겁니까?”


박장우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결을 끊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알려달라고 할 때는 꿈쩍도 않으시더니, 그 여자를 위해서 선뜻 스위스은행계좌를 넘길 것이라고는 상상 못했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포에버월드에서 아버지 외모가 30대로 변했다고 해서 마음까지 돌아가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사랑이라니... 도무지 아버지하고 안 어울려요.”

=사랑 같은 게 아니다.


“그럼 뭔데요? 동정심? 그건 더 이상한데..”

=후회 같은 거다. 지금 넌 이해하지 못할 거다. 내가 이런 말 한다고 니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것 같지는 않지만, 너도 나 같은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잘 살아라. 더 할 말 없으면 끊자.


연결이 끊겼다.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박민혁은 찜찜했다. 원했던 스위스은행 계좌도 자기 손에 넘어왔는데 그에 합당한 성취감이 들지 않았다. 그때 알림음이 울리며 박장우가 보낸 소설 원고가 도착했다. 


소설 제목은 ‘르상티망’, 민혁은 메모리스틱에 원고를 다운로드 받고 천천히 걸어 주차장으로 향했다. 운전하기 전에 제목 뜻이 궁금해서 의미를 검색했다. 


르상티망(ressentiment) : 원한 ·복수감을 뜻하는 말


‘원한, 복수라고? 제목이 뭐 이래? 그 여자 그렇게 안 생겼던데’


시동을 걸었다. 새벽시간이라 주차장에는 한 대의 차도 보이지 않았고 안개가 자욱해서 전조등을 켜도 전방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브레이크를 떼고 천천히 엑셀을 밟으면서 전진, 습기 때문인지 전기차의 모터 동력이 구동축에 전달되는 느낌이 매끄럽지 않다.

‘벌써 배터리 바꿀 때가 됐나? 뭐 이리 시원찮아?’


주차장을 빠져나가 전용도로에 오르자 엑셀을 더 밟았다. rpm이 상승하며 비로소 차가 앞으로 쑥 나가는 느낌이 났다.

‘기분 탓인가?’


도로도 텅 비었다. 가로등 불빛이 안개 속에 퍼지면서 뿌연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차피 마주 오는 차도 따라오는 차도 없다. 도로는 직선, 내비게이션으로도 4킬로미터는 그냥 직진구간이었다. 


박민혁은 가속페달을 꾹 밟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달리다보면 안개도 걷히고 마음속 찜찜함도 같이 사라질 것이었다. 속도계를 보니 시속 90킬로미터, 제한속도를 10 정도 넘었지만 단속에 걸릴 위험은 없었다. 


이때, rpm이 갑자기 치솟았다. 3천, 4천, ‘위험하다’ 속도계를 보니 100킬로미터가 넘었다. 박민혁은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이려 애썼다. 하지만 엔진 가속력이 브레이크의 제동력을 뛰어넘어 자동차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박민혁의 전기차는 브레이크를 무시하고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핸들은 동작했지만 잠시 후 급커브 구간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하면 자동차는 왼쪽으로 튕겨져 나갈 것이었다. 

“제발 서!”


박민혁은 브레이크를 여러 번 나눠서 밟으며 동시에 엔진 시동을 끄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동차 전원은 꺼지지 않았다. 속도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140, 150, 160, 마침내 커브구간에 돌입했다. 핸들을 붙잡은 그의 손에 땀이 났다. 최대한 조심하면서 커브구간을 빠져나가려는데 오른쪽 앞바퀴가 공중에 붕 뜨며 공회전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통제를 잃은 자동차는 왼쪽 측면을 아스팔트에 긁으면서 도로를 벗어나 구르기 시작했다. 


박민혁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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