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우는 윤지호가 지금이라도 훅 떠날 것 같아 불안했다. 오랜만에 -얼마나 긴 시간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는지 날짜를 세는 것도 잊어먹었다- 그녀를 만나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지만 환영처럼 이별이 겹쳐 보인다.
“내 소원도 하나만 들어줍시다.”
“소원요?”
“죽은 사람 소원이니 꼭 들어줍시다. 산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거 거꾸로 아니었나요?”
“죽어서도 살아있는 마당에 그게 대수입니까?”
말은 여유 있게 하지만 박장우는 지호가 거절할까봐 초조했다.
“들어보고요.”
“정말로 이별할 때는, 내 말은 앞으로 영원히 못 만나게 될 것 같으면 미리 말해줘요.”
지호는 박장우의 얼굴을 조금은 슬프게 쳐다봤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요.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중이거든요.”
“그것 참 너무하는군요. 그럼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겁니다.”
그 사소한 것조차 거절당했다. 윤지호는 박장우와 같이 있지만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떠난 것일까?
“이제 뭘 할 겁니까?”
그녀의 계획을 물었다.
“모르겠어요. 뒤로 걸어가는 느낌이에요. 지난 온 길과 좌우는 볼 수 있지만 앞에 뭐가 다가오는지, 어떤 풍경이 있는지는 몰라요. 예상은 할 수 있겠죠. 지나 온 길에 비춰서 생각하면, 하지만 갑자기 뭐가 튀어나올지는 모르죠.”
지호는 곧 박장우에게 ‘이제 가라’고 할 것 같았다. ‘가라’하기 전에 뭔가 말해야했다. 그래야 1분이라도 더 곁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뭐라도 말해야했다.
“그 남자는 누굽니까? 지호씨와 같이 있었던..”
“제이든이요?”
“혹시 그동안 그 남자와 있었습니까?”
“네.”
“그럼 이제 나와 헤어지고 그 남자에게 갈 겁니까?”
“그건 아닐 거에요.”
애써 질투심을 끄집어냈지만 그것으로도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더 말하지 못하면 이별이다. ‘더 말해야 하는데’
지호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예상됐다. 이제 돌아가라는..
“시후씨. 난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저도 당신이 없었으면 견디지 못했을 거에요.”
“말하지 말라니까. 그런 말하면 이별하는 것 같잖아요.”
“이별하는 거에요.”
“그러지 말아요. 제발.”
“그래야 해요. 난 조금 더 앞으로 나가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아닙니다. 시간은 많습니다. 나 돈 많아요. 여기서는 돈이 곧 시간이니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시간 많아요.”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유한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삶이 무한하다면 그 의미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영원은 대하(大河)와 같아서 붙잡지 않으면 떠내려간다. 오늘과 같은 내일, 내일과 같은 모레, 무한한 반복, 그 뻔한 반복 속에서는 몇 번을 깨어나도 못 하는 일이 있다. 꼭 오늘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과 내일이 같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별을 말하고 있지만 이미 떠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박장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말입니다. 겉으로 젊게 보여도 실제로는 70이 넘은 노인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여자 때문에 눈물을 흘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 늙은 주제에 젊은 당신을 좋아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그래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소? 당신이 뭘 하든 방해하지 않고 옆에 있게만 해줘요. 당신을 볼 수 있게만 해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지호는 눈물을 흘리는 박장우를 위로하듯 안았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여태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괜찮을 거에요. 당신은 여기에 있으면 돼요. 내가 조금 더 앞으로 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