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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Oct 29. 2024

33. 내 삶의 의미가 다른 이에게 있다면

박장우는 윤지호를 찾아 다운타운을 돌아다녔다. 어제 커피하우스 앞으로 그녀가 지나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와 함께. 


추측대로 그녀는 집에 있었다. 그의 초인종 소리를 무시하면서. 그랬던 그녀가 드디어 집을 나왔단다. 그의 편지를 봤을까? 봤는데도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이 앞을 걸어간 것일까? 그 남자와는 왜? 그 남자는 누구인데?

다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은 윤지호를 만나야 하고 만나서 오해를 풀어야 한다. 박민혁이 뭐라고 했건 그건 아무 상관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박장우는 눈에 보이는 모든 주택과 건물을 뒤지기로 했다. 한국 네트워크, 기껏해야 여의도 몇 개 정도 크기다. 건물이 많아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다 뒤지면 된다. 그런데, 그래도 없으면? 그러면 어떡하지?


사흘을 잠 자지 않고 뒤진 끝에 한국 네트워크의 모든 건물을 뒤졌다. 없다. 어디로 갔을까? 박장우는 진심으로 미칠 것 같았다. 그냥 미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럴 거면, 그녀를 왜 만났나? 이럴 거면, 그녀는 왜 그에게 웃어줬나? 이럴 거면 왜 포에버월드에 왔나? 이럴 거면 그냥 죽지. 그냥 죽지.


한국 네트워크에는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다음날은 프라하로 갔다. 윤지호가 프라하에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만, 그곳 외에 박장우가 갈 곳은 없었다. 프라하 카를교를 건너며 그녀가 보고 있었던 블타바 강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프라하의 모든 건물을 뒤졌다. 그 짓도 한번 해보니 두 번째라 쉬웠다. 또 두 번째는 쉽다고 생각하며 박장우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박장우는 박민혁의 아웃라인 면회요청에 응했다. 박민혁은 줄기차게 통화를 요청했었지만 박장우는 내내 무시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럴 필요가 없어서, 나중엔 말 섞고 싶지 않아서. 


“무슨 일로 계속 나를 찾았어?”

=아들이 아버지 찾는 게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잘 지내시죠?


가증스럽다. 효도하는 흉내라도 내는 게 돈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까지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스위스은행 계좌를 빼내기 위해 여자를 고용하다니. 그것도 윤지호를. 괘씸하다. 너무 괘씸해서 할 수만 있으면 당장 머리를 한대 패고 싶었다.


“하나만 묻자. 윤지호씨에게 뭐라고 말했니?”


박민혁은 아버지의 입에서 ‘윤지호’의 이름이 나오자 조금 놀랐다. ‘이 여자가 말은 그렇게 해놓고 일은 제대로 하고 있었어? 역시 죽기는 싫었던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호가 누군데요?

“모른 체 하지마. 니가 보낸 거 알고 있다. 그 이유도 알고 있고.”

=제가 그 여자를 왜 보내요? 누가 그래요?


박민혁은 잡아뗄 수 있을 때까지 잡아떼기로 했다. 여차하면 이 순간 스위스은행은 물건너간다. 

박장우는 한숨이 나왔다. 이런 것까지 가르쳤었나? 아니면 이런 것까지 자신을 닮은 것인가? 


“지나가 다 얘기했어! 니가 지현우와 짜고 여자를 붙여서 스위스은행 계좌를 알아내려했다고!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생각이야?”


박민혁도 한숨이 나왔다. 지현우가 박지나와 짜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것이라고는 예상 못 한 것이다. 


=지나 말 다 믿지 마세요. 아버지도 알잖아요? 걔야말로 아버지 돈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나야 가만히 있어도 내 돈 될 건데. 내가 뭐하러 그래요? 

“그만! 그만두자. 애초에 내 잘못이지. 윤지호는 어디있냐? 넌 알 수 있지?”


=전 모른다니까요. 왜 자꾸 절 의심해요?

“그만하라니까! 사업하는 놈이 일이 틀어졌으면 다음 계획을 생각해야지 언제까지 블러핑만 할 생각이야?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박민혁이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좋네요. 사업얘기 하시니까 이제 좀 예전에 아버지 같으네요. 날 이렇게 만든 건 아버지에요. 알고 계시죠? 컴퓨터 속 포에버월드 같은 데 살면서 실제 있지도 않는 것에 돈을 펑펑 쓰고, 그러면서도 날 못 믿어서 스위스은행 계좌는 알려주지도 않고. 아버지 계획이 뭐에요? 영면에 들어갈 때 알려줄 건가요? 아니면 끝까지 안 줄 건가요? 


“윤지호를 니가 보냈다는 건 인정하는 거냐?”

=아버지는 거기서 얼마나 더 있을 건데요? 10년? 20년? 아니면 나도 죽어서 거기 들어갈 때까지 있으려구요? 거기서 부자간에 만나서 가족모임이라도 하길 바래요?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한다. 스위스은행 계좌 알고 싶으면 지호씨가 있는 곳을 알아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여자는 왜 찾아요? 찾아서 손 봐주게요?

“그런 거 아니야!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박민혁은 박장우가 윤지호를 찾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름을 부를 때 ‘지호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것 보면 나쁜 감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무슨 할 말이 있는데요?

“그건 니가 알 것 없어! 도대체 넌 지호씨에게 뭐라고 말한 거야?”


박장우는 흥분했다. 실수했다. 박민혁은 그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 설마 그 여자 좋아하는 거에요? 


박장우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말하지 않는다고 아들이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뭐라 말해도 오답이 나올 게 분명하다.


=와, 진짜인가 보네. 그 여자가 일을 정말 제대로 했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스위스계좌도 알아냈으려나..? 그런데 이를 어쩐다. 아버지가 알았으니 그 여자는 망한 거 같은데. 아버지 어떻게 할까요? 그 여자에게 상을 줄까요? 벌을 줄까요?

“지호씨는 건드리지마! 니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빙고. 드디어 나도 아버지 약점 하나 잡았네요. 아버지 그거 알아요? 윤지호 보호자가 나라는 거. 보호자가 할 수 있는 게 되게 많은데, 그 중에는 계약해지도 있죠. 내가 계약해지 하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자, 이제 협상이 되려나?


박장우는 넋 나간 심정이 됐다. 


=왜 아무 말씀 안 하세요? 보니까 그 여자 찾고 싶어서 안달인 것 같은데. 제가 그 여자 찾지는 못해도 영원히 사라지게 해줄 수는 있거든요. 그러니까 사업가답게 말씀하셔야죠. 저한테 뭘 주실 거에요?


박장우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난 내 아들을 안다. 스위스은행 계좌를 알려주면 그것으로 끝이겠지. 니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넌 아마 다시는 여기 오지도 않을 거다.”

=그건 두고 봐야 알지 않을까요?


“웃기는 소리. 내가 살아있을 때도 그랬는데 니 말대로 컴퓨터 속에 있는 지금, 니가 뭐가 아쉬워서? 사업은 서로 가진 것을 교환하는 것인데 더는 쓸모없는 나와 니가 뭘 하겠니?”

=그렇다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제가 그 여자 아웃시키면 어떡할래요?


“할 수 없지. 결과가 똑같다면 받아들여야지.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

=나라면 아들을 한번 믿어볼 거 같은데요. 아버지가 더 잃을게 있나요? 저도 좀 알아봤는데 포에버월드 평균 거주기간이 4년이고 길어야 5년을 넘지 않고 자진해서 영면에 들어간대요. 거기서 더 할 게 뭐 있어요? 아버지야, 여행은 다 다녀 본 곳이고, 영화도 지금쯤이면 다 봤을 거고.. 먹는 재미가 있을 리 없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제 말은, 이제라도 마음에 좀 드는 여자 만났으면 그 여자와 알콩달콩 즐기다가 편하게 가시라는 거에요. 그래봐야 앞으로 몇 년이니 그 정도 비용은 제가 낼 게요. 거기서 천년 만년 살 것도 아니잖아요? 


“널 어떻게 믿고?”

=그것까지 제가 가르쳐 드릴 수는 없구요. 아버지가 결정해야죠.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우선 지호씨를 찾아라. 그런 다음 다시 얘기하자.”

=오케이.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찾아서 연락할 테니 다음에는 전화 빨리 받으세요. 


박민혁은 박장우와 통화를 끝내고 아웃라인 면회실을 나왔다. 문 앞에서 지현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통화라고 했을 텐데, 다 들었어?”


박민혁이 묻는데 지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들었네. 할 수 없지. 그럼 뭘 해야 할지도 알겠지? 그 여자를 찾아! 마지막 기회야.”

“지호씨는 내버려 둬!”


“이제 막 가기로 한 거야? 기백은 좋은데, 니가 뭘 할 수 있어? 선택지는 두 개야. 그녀를 찾고 계약을 유지하든가, 아니면 못 찾고 해지하든가. 니가 협조하지 않는다 해도 난 손해가 크지 않아. 어차피 노인네는 넘어왔어. 너보다도 더 다급한 것 같거든. 그러니까 열심히 찾아봐. 나도 아버지라는 사람한테 그 정도는 해주고 싶거든. 죽어서 사랑이라. 로맨틱하지 않아?”


박민혁은 지현우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쳐갔다. 박민혁의 발소리가 하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멀어지는 동안, 지현우는 박민혁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쩌자고 지호는 그런 남자와 사귀고 있던 걸까?’


지현우는 버츄얼 연결로 보았던 윤지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박장우와 윤지호가 만나서 얘기하고 웃는 모습을 상상했다. 젊게 모습을 바꾼 박장우가 호감형이긴 하지만 지호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조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윤지호는 죽었고, 난 잊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지호에게 해 줄 일이 남았다. 그녀의 포에버월드 계약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를 찾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윤지호와 박장우가 만나게만 해주면 박장우가 스위스은행 계좌를 알려줄 것이고, 박민혁은 굳이 무리를 해가며 윤지호의 계약해지를 하지 않을 것이었다. 

‘찾자. 어떻게든 찾자.’



그 시간 지호는 끝없이 걷고 있었다. 카이로 성당에서 제이든과 헤어지고 제일 처음 도착한 곳은 파리 상젤리제 거리였다. 개선문에서 콩코드 광장까지 2km, 몇 번을 왔다갔다하다, 개선문에서 방사형으로 뻗은 12개 거리를 모두 걸었다. 배고프지 않았지만 눈에 띄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있으면 들어가서 커피를 마셨다. 


다음은 맨하튼의 브로드웨이였다. 맨하튼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천천히 걸으며 거리를 장식한 화려한 네온사인에 불이 들어오고 다시 불이 꺼질 때까지 몇 번을 왕복했다. 


미국에 온 김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라는 캘리포니아 1번 국도를 따라 걸었다. 실제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샌디에이고까지 1천km가 넘는 거리라지만, 포에버월드 맵에는 40km 정도가 전부였다. 해안도로 풍경을 즐기는 포에버월드 거주민들이 차를 타고 지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한적한 국도길을 혼자 걸었다.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서쪽 바다, 그 위로 떨어지는 완벽한 석양. 그럼에도 답을 찾지 못했다. 

‘내 삶의 의미는 뭐였을까?’


삶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편한’ 대답은 싫다. 아무리 길고 어려워도 제대로 된 답을 듣고 싶었다. 제이든은 삶의 목적이 인생의 끝을 보는 것이라 했다.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걸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저 나아가야 한다는 뜻일까?

‘나의 생이 아무 의미 없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죽고 나서야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일까? 죽었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내 의식은 무엇일까? 의식마저 사라지면, 나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거리, 거리의 예술가와 서민적인 잡화점까지 포에버월드는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너무 완벽해서 그 거리를 걷는 그녀가 더 가짜 같았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일까?’


라 람블라 스트리트에 접어들었다. 모든 게 새롭다. 계절은 겨울인데 초록이 남아있는 가로수와 희게 퇴색된 보도블럭, 그리고 청명한 하늘과 바람. 그녀는 바르셀로나가 처음인데, 이곳이 현실 세계와 다르다는 게 의미 있을까? 

‘내가 살았던 바깥 세상은 진짜였을까?’ 


그것이 진짜라는 증거는 없었다. 내내 믿고 살아왔을 뿐.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살아있다 믿으며 살고 있다. 살아있다 믿는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 


지호는 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 때 박장우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를 읽고 나서 의자에 앉았다. 긴 여행이었다.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묘한 기분에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답을 얻기보다 더 많은 의문이 생긴 것 같은데’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천장을 보며 내내 생각했다. 지쳤다. ‘영면 신청할까?’

이 상태라면 아무 후회없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완전히 없어질 거라 생각하니 한없이 허망하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없어진다. 없어진다. 없어지는 게 뭐지? 없어지면 궁금증도 다 사라지겠지?’


초인종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여행을 떠나기 전과 후,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이제 박장우를 만날 용기가 생겼다. 그로 인해 그녀가 불러온 갈등, 스위스은행, 유산, 계약해지 같은 것은 죽음과 삶의 의미에 비하면 대충 넘어갈 만하다.

“열려있어요. 들어와요.”


박장우는 기적을 만난 것 같았다. 매일 윤지호의 집에 와서 초인종을 누르는 건 습관일 뿐이었다. 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벨과 벨 사이의 짧은 정적만큼의 희망조차 없다면 포에버월드에서의 하루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언젠간 응답 하겠지’라는 희망으로 하루를 이틀로 이틀을 사흘로 연장하면서 매일을 견뎠다. 찾아다닐 만큼 찾아다녔고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지호의 집을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는 것밖에 없었다. 


처음엔 어떤 조짐도 없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날 때는 징조나 예감이 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넋 놓고 초인종을 눌렀다. 윤지호가 응답할 것이라고 조금이라도 예상했다면 다음 행위를 준비했을 텐데, 정작 그녀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뭘 해야 할지 몰라 동상처럼 문 앞에 서있었다. 초인종을 한번 더 누르면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방금 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벨을 누르지도 못했다. 

만약에 지호가 문 앞에 나와주지 않았다면 박장우는 그 자리에 선 채 몇 시간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들어와요.”


윤지호는 그가 마지막 봤었던 그 모습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들어가도 돼요?”


이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인가? 그는 아무 짓도 한 게 없는데 가만 서 있다가 죄인이 되었다. 


“그럼요. 들어와요. 차는 없지만.”


박장우는 윤지호와 식탁에 마주 앉아서 보기만 했다. 지호도 말하지 않았다. 약간의 머쓱함에 눈 둘 곳을 몰라 여기저기 쳐다볼 뿐이다. 


“난 괜찮아요.”


지호가 먼저 말했다.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박장우는 살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박장우는 사과했다.


“받아들일게요. 엄밀히 그쪽이 미안할 건 아니지만, 미안해요. 그쪽이라 부른 건 이제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아무렇게 불러요.”


“그쪽 잘못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된 거겠죠.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잘 참고 있는데 ‘뭐하고 지냈냐?’는 말을 듣자 서러움이 왈칵 몰려왔다. ‘어떻게 그걸 몰라? 내가 당신 찾아다닐 거라는 생각을 못해? 내가 그 정도도 아니야?’


“그냥. 이것저것하면서...”

“많이 찾아왔었죠? 미안해요. 소설 때문에요. 아무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 다른 얘기를 하자!


“소설은 다 썼어요?”

“네. 안 그래도 부탁할 게 있어요.”


지호는 작업실로 가서 그녀의 노트북을 가져왔다. 


“이 안에 있는 소설, 맡길 게요.”


박장우는 엉거주춤 노트북을 받으면서 물었다.


“맡기다니.. 이걸 왜 나에게 주는데요?”


지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 그녀가 박장우에게 보여줬던 싱그러움은 없었다.


“일단은 다 썼으니까, 읽어주세요. 한명도 읽지 않는 소설은 너무 슬프잖아요.”

“그야 당연히, 지금이라도 당장 읽어볼 수 있소.”

“아뇨. 지금 말고 나중에. 그리고 또 하나는...”


지호는 말할 결심이 서지 않은 것처럼 조금 망설였다.


“뭐든 말하시오. 지호씨 부탁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난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내 마지막 소설을 부탁할게요. 그래야 누구에게라도 더 읽힐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박장우는 순간 화가 나서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박민혁이 윤지호의 계약을 해지할 것이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호씨가 끝나긴 왜 끝납니까?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그럴 거라면 이 노트북 당장 가져가요.”


지호는 그런 박장우를 위로하는 것처럼 말했다. 


“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내가 안 괜찮아요. 내가 정말 안 괜찮단 말이요. 민혁이 그놈이 뭐라고 협박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나한테 맡기고.”


지호가 박장우의 말을 끊었다.


“그만해 주세요. 현우씨도 그러고 그쪽도 그러고 전부 자기에게 맡기라고 하는데 내 일이에요. 비록 포에버월드에 온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남의 돈으로 연명하는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게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이럴까봐 시후씨를 더 보지 않으려 했는데 이렇게 그쪽을 만난 건, 괜찮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였어요. 혹시라도 나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안 되니까.”


“문제 있소. 아주 많이 있소. 지호씨가 끝이면, 그럴 리 없지만 정말로 끝이라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거요.”


박장우의 말을 들은 지호가 일어섰다. 박장우도 일어났다. 지호는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집 밖으로 나갔다. 박장우도 따라 나갔다. 오지 말라는 말도 없었으니. 


“처음 여기 왔을 때, 이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어요. 그때가 생각나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정처 없이 걸었을 때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은 게 명확한데 여전히 모르겠어요. 난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걸까요?”

“그래도 지호씨는 나보다 낫잖아요. 이런 소설도 쓰고.. 그에 비하면 난 그 긴 시간 동안 뭐 하나 한 게 없소.”

“살아있을 때는 어땠어요? 좋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 묻고 답했어야 할 것들에 대해 이제 이야기하고 있다. 


“난 부동산 사업을 크게 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부자가 됐습니다. 결혼은 두 번했고, 아들 하나, 딸 하나 있고..”


“그러니까요. 좋았어요? 저에 비하면 가진 것도 많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고.. 궁금해서요. 다 가진 사람은 나처럼 늘 부족한 사람에 비해 더 행복했는지..”


“그럼 뭐합니까? 지금은 똑 같은데. 아, 죽으면 똑 같다는 전제에서 그렇다는 거요. 재미없는 얘기 하나 할까요?”


강변 벤치가 나오자 박장우는 벤치에 앉았다. 그 옆에 지호도 앉았다. 


“사업하다가 크게 망한 적이 있어요. 사업이 잘 될 때 함께 어울려 다니는 인간들이 있었는데 망하고도 한동안은 연락도 오고해서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셨어요. 그런데 난 돈이 없으니까 늘 얻어먹는 처지였죠. 그 자들은 돈이 너무 많아서 나하나 쯤 더 끼어서 먹는다고 해서 불만일 게 없었지만, 난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날 때마다 불편하고, 밥을 먹어도 맛이 없더군요.”


“그럼 나가지 말지 그랬어요?”

“나오라는데 안 나가면 자격지심 때문에 그러나보다 생각할까봐 안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부동산 사업이라는 게 혼자서 하는 게 아니거든요. 좋건 싫건 이 바닥에 붙어있으려면 그치들과 어울려야 했습니다.”


“그래서요?”

“1년쯤 해매다 보니 그 다음부터는 연락도 잘 오지 않더군요. 좀 섭섭하긴 했지만 차라리 잘됐구나 하고, 마음 접고 대충 살았습니다. 그리고 옛날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그땐 참 잘나갔구나. 고급호텔에서 술도 마시고, 주말마다 골프장도 나가고, 명절 되면 산더미 같은 선물도 받고... 그런데 망하고 나서 내 꼴을 보니, 어디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냥 일반인이더라구요. 진짜 죽고 싶었습니다. 내가 나한테 쪽팔려서. 과거의 나한테 현재의 내가 너무 쪽팔려서 사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데요?”


지호가 묻자 박장우는 겸연쩍게 웃었다.


“내가 한 건 별거 없습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국토부 장관까지 지냈던 어떤 정치인이 허름한 옷을 입고 꾸부정하게 서 있더라구요. 그 행색이 얼마나 초라한지 먼저 말 붙이기도 민망해서 그냥 모른 체 했습니다. 그러다 생각했죠. 다들 한방에 훅 가는구나. 잘 나가는 거 한때고 놔 버리면 그냥 곤두박질 쳐서 보이지도 않는구나. 그 뒤로 어찌된 일인지 투자하는 것마다 대박을 쳐서 다시 큰돈을 벌었습니다. 내 명성을 되찾은 거죠. 그런데 느낌이 달랐습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자꾸만 망했을 때 내 얼굴이 떠오르는 거에요. 게다가 잘나가는 사람들을 만나도, 이 인간도 망하면 별 거 아니겠구나, 저 정치인도 감방 가면 일반인보다도 못하겠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는 게 결국 다 똑같다는 얘기인 거죠?”

“돈 잘 벌고 유명하고 잘 나가는 건 한 때라는 겁니다. 끝나고 나면 정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절벽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잘 나가는 인간도, 망하거나 망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늙고 병들 것인데 그 망했을 순간을 상상하면 하나도 부러워할 게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가 다가오니까 내가 고작 죽으려고 이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후회도 되고, 삶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콱 죽었습니다. 그러니 내 인생이 좋고 말게 뭐 있겠습니까? 평가할 가치도 없습니다. 남긴 게 하나도 없는데.”


“돈 많이 벌었잖아요.”


박장우는 지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내 아들놈이 스위스은행 계좌 때문에 분탕질 치는 거 알고 있죠? 그리 말하면 지호씨도 날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기껏 돈 벌어서 아들한테 휘둘리고 있다고.”

“그게 아니라, 돈 번 것도 충분히 가치있는 것 같아서. 전 시후씨보다, 아, 그냥 시후씨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그쪽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백배 낫습니다.”

“전 30년 정도 밖에 안 살아서 그런지, 더 의미를 못 찾겠어요. 마지막은 아팠던 기억밖에 없고, 몇몇 공모전에서 당선되긴 했지만 날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꼭 본인한테 의미가 있어야 합니까? 남한테 의미 있으면 안 됩니까?”

“그게 무슨...?”


“지호씨는 내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내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너무 늦게 알게 됐다는 게 아쉽고, 게다가 지금은 살아있는 것도 아니니 더 미치겠고. 그리고 지금 우리 문제도 내가 다 해결할 수 있는데 그걸 안 된다고 하니까.. 더..”


지호가 박장우의 말을 끊으며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고마워요. 내 의미가 돼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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