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씨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작가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할 줄밖에 모릅니다. 미안합니다.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박시후가 아니라 박장우입니다.
박시후는 내 아들 흉내를 내기 위해 새로 만든 이름인데, 이런 식으로 일이 잘못될지 몰랐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아들 녀석이 지호씨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잘 모르지만, 그 말이 지호씨에게 큰 상처가 됐을 겁니다.
다 잊으세요. 그건 잘못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핑계 대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한번만 만나서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내 잘못을 내가 바로잡을 수 있게 기회를 주세요.
부탁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정말 미안합니다.
박장우 드림.”
박장우는 손으로 적은 편지를 지호의 집, 문 밑으로 밀어 넣었다. 지호가 집에 있다면 읽을 것이고, 집에 없어도 돌아와서 읽게 될 것이다. 편지를 넣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응답이 없었고 박장우는 힘없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지호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었다.
아름답다. 이 모든 게.
그녀의 마지막 문장은 간결했고, 소설의 3분의 2 지점에 위치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으로 소설의 앞과 뒤가 완벽하게 이어지며 하나의 소설로 완성됐다. 드디어 끝, 탈고다.
소설을 쓸 때는 소설을 다 쓰는 것만 생각했는데, 다 쓰고 나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일어나서 집안을 거닐었다. 마음 같아서는 강변을 따라 좀 걷고 싶었지만 밖에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박장우는 더욱 더..
게다가 곧 영면에 들어갈 건데 새로운 어떤 것을 접하고 싶지 않았다. 경험과 인연은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머리는 생각보다 개운했다. 원래대로라면 비활성 메모리를 비우지 않아 깨질 듯 어지러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전부 비우고 쏟아낸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텅 빈 느낌이며 아무것도 없기에 이제 한 글자도 더 쓸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뭘 해야 하지?’
생각이 남지 않으니 아무것도 결정도 할 수 없다. 힘들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춥지도 않다. 욕구가 없으니 결정할 거리가 없다. 머리만 텅 빈 게 아니라 영혼도 텅 빈 것일까?
책장을 훑어 봤다. 포에버월드에 온 첫날, 그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권을 꺼내 남겨뒀던 마지막 챕터 [소돔과 고모라 2]를 읽기 시작했다.
악덕과 퇴폐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신의 노여움을 받아 유황과 불에 의하여 모두 멸망했다. 프루스트는 왜 8권 마지막 챕터의 소제목을 ‘소돔과 고모라’로 붙였을까? 그에게 그 시대 파리(Paris)는 모두 불타 없어져야 할 타락이었나?
포에버월드에는 신이 없으니 어떤 쾌락을 즐겨도 멸망할 걱정은 없다. 하지만 이 쾌락이 쾌락인가? 몸이 남지 않았는데 뭘 위한 쾌락일까?
8권을 다 읽고 9권을 뽑았다. 현실세계에 번역되지 않은 책이 포에버월드에 나왔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책 표지를 넘긴 순간 쓴웃음은 당황으로 바뀌었다. 표지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뿐이었다. 10권도 백지, 11권도 백지, 12권도 백지. 9권부터 12권까지는 모두 내용이 없는 껍데기들 뿐이었다.
12권까지 다 읽으면 어떤 미련도 없이 영면에 들려고 했는데 또 핑계거리가 생겨 버렸다.
‘왜 하필 백지가..’
생각해보면 포에버월드와 똑같았다. 여기도 껍데기뿐이다. 실체는 없고 감각만 남아있는 디지털 세상이다.
지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권을 책장에 꽂았다. ‘이건 암시가 아닐까?’
무슨 암시든, 이런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지호는 즉시 문을 열고 나가 제이든을 찾아갔다. 문을 열면서 박장우가 문 밑으로 밀어 넣은 편지는 보지 못했다.
제이든은 정원에 나무를 심고 있었다.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뿐인 나무라 무슨 나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이든은 지호가 온 것을 아는 것 같은데도 돌아보지 않고 정성스럽게 나무를 심는 것에만 집중했다. 땅을 파고 나무를 심고 땅을 다지고 물을 뿌린다. 지호는 가만히 제이든 옆에 섰다.
“내일이 지구의 종말인가요?”
“사과나무 아닙니다. 여긴 지구도 아니고.”
“지구가 망하면 포에버월드도 망하는 거 아니에요?”
“아닐 걸요?”
“네? 왜요?”
그제야 제이든은 허리를 펴고 지호를 쳐다봤다.
“소설을 다 썼군요.”
“네. 덕분에요.”
“재밌어요?”
“아닐 걸요? 호호.”
지호가 제이든의 말투를 따라하며 웃었다.
“재미없는 소설을 왜 써요?”
“나무는 왜 심어요?”
“뭐라도 해야 하니까요. 안 그럼 포에버월드에 있는 이유가 없잖아요.”
제이든은 나무 심는데 사용한 삽을 옆에 놓고 물통도 가지런히 옮겼다.
“걸을까요?”
“네.”
“소설을 다 쓰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죠? 그래서 온 거죠?”
“네. 제이든은 그 오랜 시간 포에버월드에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죠? 정말 긴 시간이죠. 우습겠지만 꽤 많은 시간을 뭘 할까 고민하면서 보냈어요. 살아있을 때는 너무 바빠서 한번도 하지 못했던 고민을 여기서는 원 없이 했죠.”
“이제 말해주세요. 여기를 떠날 수 있는 어려운 방법. 제이든이 많이 손해인 방법을.”
지호는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 못 읽게 됐으니 쉽고 빠른 영면은 선택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가고 있어요. 지호씨, 성당에 가본 적 있어요?”
제이든은 커피하우스를 지나쳐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포에버월드 다운타운에는 쇼핑몰과 거주민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지호는 제이든의 옆을 따라 걸으며 물었다.
“이곳에 성당이 있어요? 그럼 교회도, 절도 있어요? 신은 없다면서요?”
“성당만 있어요. 성당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리고 작아서 잘 보지 않으면 못 찾을 걸요?”
제이든이 가는 대로 따라 걷다 보니 정말 성당이 있었다. 1층 건물에 회칠한 외벽은 하얗게 윤이 났다. 나무색 정문 위에 석고로 만든 성모상이 있고 그 위에 희고 심플한 형태의 작은 십자가가 있었다.
십자가 뒤로 석양이 떨어졌다. 언제나처럼 완벽한 석양. 제이든은 석양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마침 시간이 된 모양이네요. 이 시간을 기억해요. 석양이 시작되고 30분만 유효하니까.”
“네?”
“들어가요. 들어가면 알아요.”
작은 성당인데도 안에 있을 건 다 있었다. 작은 제단 밑으로 신도들이 앉는 긴 나무의자가 3줄, 그 오른편으로 고해실이 있었다.
“여긴 왜?”
“이 시간에는 고해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이제 우리는 여행을 떠날 겁니다.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따라해요.”
제이든은 고해실의 문을 열고 쿵, 쿵 소리 나게 세 번을 여닫았다.
“이러면 여기 문에 조그만 불빛 보이죠? 시스템이 활성화된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 격자를 열고 비밀번호 8자리 입력, 연속해서 가고 싶은 도시 코드 6자리 입력, 다 외웠죠?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지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제이든은 고해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잠해졌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제이든? 제이든?”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지호는 고해실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제이든이 사라졌다. 어디론가 전송된 것이다. 고해실 문 귀퉁이의 작은 구멍에서는 여전히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스템은 아직 활성화된 상태다. 지호도 제이든이 했던 방식 그대로 격자창을 열고 같은 비밀번호와 도시코드를 입력했다. 그리고 고해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전송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여행센터를 통해 박장우와 프라하에 놀러 갔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다만 전송 스팟이 여행센터가 아니라 성당이라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요금도 무료.
그녀가 도착한 곳은 이집트 카이로 시내의 작은 성당이었다.
제이든은 성당 밖에서 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랐어요? 포에버월드 개발단계에서 테스트로 만들어 놓은 백도어입니다. 이걸 통하면 전 세계 네트워크 어느 곳이라도 간단히 이동할 수 있어요. 시스템에 여행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에 지호씨가 한국 네트워크에서 사라진 건 아무도 알 수 없고요.”
“그러니까 이게 그 어려운 방법이군요? 제이든이 많이 손해인..”
“그런 셈이죠. 이집트 온 김에 구경 갈까요? 사하라 사막이 맵에 추가됐다는데 가보고 싶지 않아요?”
지호와 제이든은 AI 베두인이 운전하는 사막용 4륜구동 짚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사막의 모래 위를 달리는 랜드크루져는 꼭 바다 위를 달리는 모터보트처럼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모래언덕 사이를 질주했다. 고속회전하는 고무 타이어에 모래가 부서지며 갈라지는 소리, 서쪽 지평선 위에 걸린 태양빛이 만든 짚차의 그림자, 차 안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연이 들려주는 감각적인 이야기에 지루할 틈은 없었다.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변화했다. 처음에는 노랗던 모레 색깔은 사막의 석양빛에 붉게 바뀌더니 목적지인 화이트 사하라에 도착할 무렵에는 온통 하얗게 변했다. 수백만 년전에 바다속에 가라앉아 있던 석회층이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융기해서 만들어낸 석회암 지대, 30미터가 넘는 석고 기둥들이 사방에 솟아있고 석회암 위에 융단처럼 깔린 흰모래는 미세한 다이아몬드 가루처럼 반짝였다.
“이집트에 가면 진짜 이런 곳이 있나요? 아니면 포에버월드에만 있는 건가요?”
지호가 제이든에게 물었다.
“원래 있는 곳이라고 하던데, 나도 안 가봐서 실제와 얼마나 같은지는 모르겠네요.”
제이든도 지호와 다르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며 경의로움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둘 다 처음 본 광경이니 뭐가 진짜인지는 의미가 없겠군요.”
“경험론에 따르면 우리에겐 이게 진짜인 거죠.”
“저거 봐요. 꼭 독수리가 앉아 있는 것처럼 생겼어요.”
지호가 가리킨 대형 석상은 뾰죽한 부리를 동쪽으로 가리키며 곧 날아갈 듯 날개를 펴고 있다.
“그렇네요. 저기서 야영할 건가 봅니다.”
이곳까지 짚차를 운전해온 베두인은 독수리 모양의 기둥 옆에 천막을 치고 있었다. 곧 해가 떨어지고 사막의 밤이 찾아왔다. 베두인은 모닥불을 피우고 정체불명의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지호는 식욕은 없었지만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저 AI는 우리가 안 먹는다고 해도 만들겠죠?”
“그렇죠. 그렇게 코딩됐죠.”
“우리 인생도 정해진 것일까요? 정해진 길을 따라 걷게끔 말이에요.”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까요? 돌이켜 생각해봐요. 일어날 일은 기어코 일어나고, 안 되는 일은 안 되죠. 인간의 행위라고 해서 물리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행위가 물리법칙과 무슨 상관있어요?”
제이든은 조그만 나뭇가지를 꺾어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나뭇가지는 곧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불꽃에 타들어간다.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지호씨는 32살에 죽었다고 했죠? 지호씨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물질의 생화학적 조합이 유효기간 32년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 적 없어요? 내 생각에는 그런 게 없다면 더 이상한 것 같은데. 모든 물질은 그 형태를 지속할 수 있는 연한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럼 교통사고로 죽는 건요?”
“산식이 조금 더 복잡해지겠지만 모든 변수를 집어넣고 계산해보면 사고일시와 결과를 물리학적으로 충분히 도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 포에버월드를 봐요. 모두 산식과 코딩으로 이뤄져 있는데, 거의 진짜 같잖아요.”
“정해져 있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정해져 있지 않다면 뭘로 설명해요?”
“자유의지와 선택.”
“아, 그게 있었군요. 깜빡했어요. 너무 오래 코딩에 의존하고 살았더니. 하하.”
대화에 열중했더니 음식을 준비하던 AI 베두인은 요리된 음식을 놔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어디에 갔을까?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포에버월드 말구요. 진짜 죽으면.”
“드디어 우리가 공통의 궁금증에 도달했네요. 내가 포에버월드를 만든 목적에 대해 물은 적 있죠? 난 그걸 알고 싶어서 포에버월드를 만들었어요.”
“저승과 비슷한 곳을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아뇨. 죽기 전에 이곳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길 바랬어요.”
“그래서 알아내셨어요?”
지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제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하지만 내가 왜 살았는지는 알 것 같아요. 사는 동안은 사는 것 자체가 가장 중대한 목표였기 때문에 왜 사는지 알아낼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 우리는 삶을 지속하는 데에만 어마어마한 리소스를 투입하죠. 더욱이 남들보다 낫게 살려면 더 큰 노력이 필요하고. 그런데 현실에서 삶을 끝내고 보니까 왜 살았는지는 알 것 같아요.”
“왜 살았는데요?”
“끝을 보기 위해서요. 내 인생이 이렇게 가면 어디까지 가나, 어떤 모습이 되나, 그 끝을 보려했던 거죠.”
“허무하다.”
제이든은 빙그레 웃었다.
“지호씨는 왜 살았던 것 같아요?”
“글쎄요. 소설가로 유명해지고 싶었는데.. 그게 사는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천천히 생각해봐요. 포에버월드에서는 생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고,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지호는 포에버월드를 만든 목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대부분 거주민들이 삶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삶을 연장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서 이곳을 이용할지라도, 설계자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 시간이 많지 않아요. 날 협박한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해주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한다고 했어요.”
“언제요?”
“언제일지 몰라요. 내일일 수도 있고..”
지호는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다.
“내가 도와줄까요?”
제이든은 정말 도와줄 것 같았다. 그는 설계자니까 포에버월드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 네트워크를 자신만의 백도어로 오가는 것처럼.
“아뇨. 괜찮아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참, 죽는 게 아니지. 제 말은 여기서 떠나게 돼도... 참,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갑자기 계약해지되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이렇게 말하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지나요?”
지호가 물었지만 제이든은 쉽게 답하지 않았다.
“계약이 만료되거나 해지되면 콜센터에서 통보하고 영면을 준비하는 건데...”
“그러니까요. 콜센터 전화도 안 받으면요? 제가 전화 받지 않은지 제법 됐거든요.”
“전화를 안 받아요? 멋지네. 그 생각은 못해 봤는데요. 프로토콜상, 거주민이 응답하지 않으면 영면절차가 진행되지 않게 돼 있긴 한데.”
“그래도 제 ST칩을 강제로 뽑으면요?”
“이론적으로는 사라지겠죠.”
모닥불이 꺼졌다. 사막에 마지막 남았던 불이 사라지니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졌다.
“와, 아무리 디지털세상이라고 해도 이곳이 아름다운 건 인정해야겠어요. 정말 잘 만들었어요.”
“이건 후배들의 작품이죠. 좀 있으면 해가 뜰 거에요. 사막에서 일출만큼 아름다운 건 없어요.”
처음에는 보라색 지평선이 보였다. 사막은 검고 하늘은 붉었다. 붉은 하늘이 주홍빛이 되면서 사막은 다크 브라운이 되고 지평선 위로 드문드문 석상이 보였다. 마침내 떠오르는 해가 지평선 위로 완전히 올라오자 사막과 하늘은 구분되지 않고 붉으면서 동시에 푸르게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토양과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기암괴석들,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화성이나 혹은 다른 우주의 천체 같았다.
“걸을까요?”
“걷는 거 좋아요.”
제이든의 말처럼 그들은 걸었다. 태양이 차오른 지평선과 평행하게 걸으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걷는 건 힘들지 않았다. 포에버월드의 특권이었다. 얼마든지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동에서 가운데로 뜨고 서쪽으로 질 때까지 걸었다. 그렇게 세 번의 일출을 보고 세 번의 석양을 맞을 때까지 그들은 걸었다.
드디어 지호가 입을 열고 물었다.
“삶은 아무 의미없는 걸까요?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삶은, 진짜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이상하잖아요. 왜 살아요?”
“의미가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의미는 분명히 있다는 거죠.”
“짐승들은 아무 의미없이 살고 있잖아요.”
“하지만 우린 짐승이 아니죠. 짐승들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인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을 생각해봐요.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인간의 정신세계와 의식은 왜 있을까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지 않나요? 우리의 뇌는 생존뿐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찾게끔 설계돼 있어요. 이러한 것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을 거에요.”
“그래도 죽으면 전부 끝이잖아요.”
“아니요. 그러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거죠. 끝이어서는 안되죠. 끝이라면 이 모든 게 의미 없으니까.”
또 사막의 밤이 찾아왔다. 불빛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밤하늘의 달과 별은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호는 제이든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다.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왜 제이든이 의미와 이유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는지, ‘의미가 없으면 살 수 없다’
“내가 알아낸 건 여기까지에요. 나머지는 지호씨가 알아내요.”
“제가요?”
“네. 내가 가르쳐준 비밀번호와 여행코드를 이용해서 어디서든 사라지고, 어디든 나타나서 걷고 또 걷다 보면 알아낼 수 있을 거에요. 지호씨라면.”
“제이든은요?”
“나도 계속 찾아봐야죠. 그러려고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돌고 있는 거니까.”
그들은 걸음을 멈췄다.
“전 시간이 많지 않은데요?”
“그러니까 더 잘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시간이 유한하니까.”
지호는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찾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