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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동이 Jul 01. 2021

슬픔을 묻어주려 이곳에 왔는데 자전거만 타고 있다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티모시와 버스에서 친해진 것? 티모시와 루크를 따라 같은 숙소에 묵은 것? 루크와 밤마다 술을 마신 것?



난 <해피투게더>의 여운을 느끼기 위해 우수아이아에 왔다.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가고, ost를 듣고, 보영과 아휘를 생각하는 일 같은 걸 하고 싶었다. 영화를 다시 보고, 챙겨 온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트레킹을 떠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 그리고 마을로 내려와 열량 높은 밥을 먹는 일. 불면증이 심한 내가 여기서는 초저녁부터 잠을 잔다. (물론 그러고 밤에 또 깨어나 술을 마시지만)


내 안의 슬픔 따위는 생각해 볼 시간도 여력도 없다. 맨 처음엔 잘 따라다녔는데 점점 체력도 달리고 화도 나기 시작했다.




'핑계를 대고 빠져야겠다.'


티모시는 친절하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배려심도 깊다. 루크는 달랐다. 매일 밤 술을 마시며 친해지고 보니 천진난만한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엄격한 운동부 코치 같았다. (분명 고생태학을 전공하고 있다 했는데….)


내가 매일 아침 핑계를 대며 빠지고 싶어 할 때마다 루크는 눈치를 줬다. 아프다고 하면 그럴 땐 더더욱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피곤하다고 하면 자신은 포기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고 얘기했다. 난 이걸 원한 적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포기야?,라고 묻고 싶었지만 내가 한 일은 옷을 주워 입고 따라나서기.


할 일이 있다고 말하면 "무슨 일?"이라고 되물어 사람을 당황케 했다. 하지만 늘 끝말은 같았다.


"물론 선택은 니 자유지만."


'자전거 타기'라고 했을 때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한강 공원을 달리는 … 그런 걸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이 타는 자전거는 기어가 몇 개인지, 어떤 경사도에서 몇 단으로 올려야 하는지 타도 타도 감이 오지 않는 그런 자전거다.


트레킹도 일반 산이 아니었다. 돌과 눈과 얼음과 나무와 동물들과 … 맞다, 여기는 남미였지.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계속 가도 가도 오르막 길만 펼쳐져 있었다. 그래도 루크는 늘 옆에서 말동무를 해 주는 친구였다. 하지만 그날은 내가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기어를 아무리 경사도에 맞게 바꿔도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진짜 울고 싶었다. 다 포기해버리고 싶었다.


늘 옆에서 조력자가 돼 주었던 루크도 안 되겠는지 조금씩 앞서 가다가- 앞에 보이지 조차 않을 만큼 멀어졌다.


화가 났다. 솔직히 말하면 루크한테도 좀 화가 났고, 나 자신한테 가장 화가 났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잘 달리고 싶은데, 난 왜 이 모양 이 꼴이지? 자책도 하게 되었다. 분명 한참이나 앞서서 달려가고 있을 거야.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을 수도 있어. 나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핸드폰이 없었기에 - 이대로 숙소에 내려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달렸다. '가다 보면 한 명은 보이겠지, 그래. 한 명은 보이겠지.' 더 이상 페달을 밟는 게 불가능해서 자전거를 양손에 끌고 걸어가는데 저 앞에 루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첫날 본 그 천진난만한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기 저 언덕 위에 있는 통나무 집 보여? 바로 이 코너만 돌아가면 끝이야. 이것 봐. 하면 다 해낼 수 있잖아."


루크가 등을 토닥여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



나는 자전거를 발로 걷어찼다.


"야! 난 <해피투게더>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망할 놈의 트레킹이나 이런 바이킹 때문이 아니라 <해피투게더> 때문에 우수아이아에 온 거라고!"


루크가 놀랐는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내 얼굴만 쳐다봤다. 자전거를 걷어차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고,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화를 내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도망갈까?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 길이라 자전거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  루크가 한 말은 …


 <해피투게더가> 뭔데?


하아…….



우리는 결국 진짜 어색해진 상태로 최종 목적지인 통나무 집에 다다랐다. 먼저 도착해있던 다른 일행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이전 상황을 모르는 티모시가 찍어준 사진에 그때의 어색한 분위기가 잘 담겨 있다.)




나는 사과하는 법을 잘 모른다. 어렸을 때도 엄마나 아빠랑 싸우고 나면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화가 풀릴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화가 풀려도 방 밖을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잘 몰랐다. 늘 먼저 노크를 해 주는 건 엄마 아빠 쪽이었다. 분명 내가 잘못한 일인데도 아빠나 엄마가 먼저 사과를 해줬다. 그럼 나는 그게 또 화가 나서 더 크게 화를 냈다. 내가 한 잘못을 몰라서가 아니라, 먼저 사과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화가 나서. 잘못한 게 크게 없음에도 먼저 사과를 해 주는 엄마 아빠 모습에 화가 나서.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늘 먼저 사과를 해줬고, 나는 더 크게 화를 냈다.


여기엔 내 가족도, 날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연인도 없다.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내 방도 없다. 아이팟에 담아온 노래를 들었다. 뭐라도 귀에 꽂고 있어야지 안 그러면 사람들이 또 다가와 말을 시킬 것 같았다. 그때 루크가 다가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고체 설탕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고체 설탕

'아 … 이거 뭔가 익숙한데.'


나는 그것이 사과의 표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난 여기서도 사과를 먼저 하지 못했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창피했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 루크가 선수를 쳤다.







미안해. 내일은 네가 해보고 싶었던 걸 내가 따라가 볼게.


난 또 먼저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뭐가 있지? 더 화내지 않기,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이 감정을 더 끌지 말고 여기서 잘라내기, 다시 친하게 지내기.


"나도 미안해. 자전거를 발로 찬 건…"


루크가 웃었다. 사실 진짜 미안한 건 자전거를 발로 찬 일이 아니었다. 나는 루크에게 화 낼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화를 냈다. 따라나선 건 내 선택이었다. 결국 내가 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너 때문에'라는 프레임을 씌워 루크를 원망했다. 그게 가장 쉬우니까. 가장 미안한 일은 그 지점이었다. 루크도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근데 너 진짜 과격하더라.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감정이란 것 때문에 평생 풀리지 못하는 관계도 있고, 감정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 관계도 있다. 모든 건 감정의 문제다. 그리고 그 감정이란 것은 내가 조절하기 나름이다. 안다, 다 아는 데 쉽지 않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화해를 했다. (다음 날 또 싸울 뻔했지만…) 그리고 이날은 기분 좋게 귀여운 강아지와 사진도 찍었다.





***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남쪽 지방에는 이렇게 커다란 유기견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분명 주인이 있는 개들일 거라 했다. 낮에는 길을 떠돌며 방랑하다가 해가 질 때쯤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그게 말이 돼?'


그 말을 들을 때는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 지금 개들의 상태를 다시 보니 정말 주인이 있고, 집이 있는 개들 같긴 하다.


개들도 참 남미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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