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티모시와 버스에서 친해진 것? 티모시와 루크를 따라 같은 숙소에 묵은 것? 루크와 밤마다 술을 마신 것?
난 <해피투게더>의 여운을 느끼기 위해 우수아이아에 왔다.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가고, ost를 듣고, 보영과 아휘를 생각하는 일 같은 걸 하고 싶었다. 영화를 다시 보고, 챙겨 온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트레킹을 떠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 그리고 마을로 내려와 열량 높은 밥을 먹는 일. 불면증이 심한 내가 여기서는 초저녁부터 잠을 잔다. (물론 그러고 밤에 또 깨어나 술을 마시지만)
내 안의 슬픔 따위는 생각해 볼 시간도 여력도 없다. 맨 처음엔 잘 따라다녔는데 점점 체력도 달리고 화도 나기 시작했다.
'핑계를 대고 빠져야겠다.'
티모시는 친절하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배려심도 깊다. 루크는 달랐다. 매일 밤 술을 마시며 친해지고 보니 천진난만한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엄격한 운동부 코치 같았다. (분명 고생태학을 전공하고 있다 했는데….)
내가 매일 아침 핑계를 대며 빠지고 싶어 할 때마다 루크는 눈치를 줬다. 아프다고 하면 그럴 땐 더더욱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피곤하다고 하면 자신은 포기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고 얘기했다. 난 이걸 원한 적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포기야?,라고 묻고 싶었지만 내가 한 일은 옷을 주워 입고 따라나서기.
할 일이 있다고 말하면 "무슨 일?"이라고 되물어 사람을 당황케 했다. 하지만 늘 끝말은 같았다.
"물론 선택은 니 자유지만."
'자전거 타기'라고 했을 때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한강 공원을 달리는 … 그런 걸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이 타는 자전거는 기어가 몇 개인지, 어떤 경사도에서 몇 단으로 올려야 하는지 타도 타도 감이 오지 않는 그런 자전거다.
트레킹도 일반 산이 아니었다. 돌과 눈과 얼음과 나무와 동물들과 … 맞다, 여기는 남미였지.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계속 가도 가도 오르막 길만 펼쳐져 있었다. 그래도 루크는 늘 옆에서 말동무를 해 주는 친구였다. 하지만 그날은 내가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기어를 아무리 경사도에 맞게 바꿔도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진짜 울고 싶었다. 다 포기해버리고 싶었다.
늘 옆에서 조력자가 돼 주었던 루크도 안 되겠는지 조금씩 앞서 가다가- 앞에 보이지 조차 않을 만큼 멀어졌다.
화가 났다. 솔직히 말하면 루크한테도 좀 화가 났고, 나 자신한테 가장 화가 났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잘 달리고 싶은데, 난 왜 이 모양 이 꼴이지? 자책도 하게 되었다. 분명 한참이나 앞서서 달려가고 있을 거야.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을 수도 있어. 나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핸드폰이 없었기에 - 이대로 숙소에 내려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달렸다. '가다 보면 한 명은 보이겠지, 그래. 한 명은 보이겠지.' 더 이상 페달을 밟는 게 불가능해서 자전거를 양손에 끌고 걸어가는데 저 앞에 루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첫날 본 그 천진난만한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기 저 언덕 위에 있는 통나무 집 보여? 바로 이 코너만 돌아가면 끝이야. 이것 봐. 하면 다 해낼 수 있잖아."
루크가 등을 토닥여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
나는 자전거를 발로 걷어찼다.
"야! 난 <해피투게더>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망할 놈의 트레킹이나 이런 바이킹 때문이 아니라 <해피투게더> 때문에 우수아이아에 온 거라고!"
루크가 놀랐는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내 얼굴만 쳐다봤다. 자전거를 걷어차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고,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화를 내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도망갈까?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 길이라 자전거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 루크가 한 말은 …
<해피투게더가> 뭔데?
하아…….
우리는 결국 진짜 어색해진 상태로 최종 목적지인 통나무 집에 다다랐다. 먼저 도착해있던 다른 일행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이전 상황을 모르는 티모시가 찍어준 사진에 그때의 어색한 분위기가 잘 담겨 있다.)
나는 사과하는 법을 잘 모른다. 어렸을 때도 엄마나 아빠랑 싸우고 나면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화가 풀릴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화가 풀려도 방 밖을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잘 몰랐다. 늘 먼저 노크를 해 주는 건 엄마 아빠 쪽이었다. 분명 내가 잘못한 일인데도 아빠나 엄마가 먼저 사과를 해줬다. 그럼 나는 그게 또 화가 나서 더 크게 화를 냈다. 내가 한 잘못을 몰라서가 아니라, 먼저 사과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화가 나서. 잘못한 게 크게 없음에도 먼저 사과를 해 주는 엄마 아빠 모습에 화가 나서.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늘 먼저 사과를 해줬고, 나는 더 크게 화를 냈다.
여기엔 내 가족도, 날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연인도 없다.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내 방도 없다. 아이팟에 담아온 노래를 들었다. 뭐라도 귀에 꽂고 있어야지 안 그러면 사람들이 또 다가와 말을 시킬 것 같았다. 그때 루크가 다가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고체 설탕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아 … 이거 뭔가 익숙한데.'
나는 그것이 사과의 표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난 여기서도 사과를 먼저 하지 못했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창피했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 루크가 선수를 쳤다.
미안해. 내일은 네가 해보고 싶었던 걸 내가 따라가 볼게.
난 또 먼저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뭐가 있지? 더 화내지 않기,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이 감정을 더 끌지 말고 여기서 잘라내기, 다시 친하게 지내기.
"나도 미안해. 자전거를 발로 찬 건…"
루크가 웃었다. 사실 진짜 미안한 건 자전거를 발로 찬 일이 아니었다. 나는 루크에게 화 낼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화를 냈다. 따라나선 건 내 선택이었다. 결국 내가 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너 때문에'라는 프레임을 씌워 루크를 원망했다. 그게 가장 쉬우니까. 가장 미안한 일은 그 지점이었다. 루크도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근데 너 진짜 과격하더라.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감정이란 것 때문에 평생 풀리지 못하는 관계도 있고, 감정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 관계도 있다. 모든 건 감정의 문제다. 그리고 그 감정이란 것은 내가 조절하기 나름이다. 안다, 다 아는 데 쉽지 않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화해를 했다. (다음 날 또 싸울 뻔했지만…) 그리고 이날은 기분 좋게 귀여운 강아지와 사진도 찍었다.
***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남쪽 지방에는 이렇게 커다란 유기견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분명 주인이 있는 개들일 거라 했다. 낮에는 길을 떠돌며 방랑하다가 해가 질 때쯤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그게 말이 돼?'
그 말을 들을 때는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 지금 개들의 상태를 다시 보니 정말 주인이 있고, 집이 있는 개들 같긴 하다.
개들도 참 남미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