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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동이 Jun 29. 2021

50시간 동안 버스를 탄다는 것은 말이야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부터 우수아이아까지 버스를 타면 걸리는 시간 (출처: 구글)



거짓말이 아니다. 50시간 동안 달리는 버스가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때는 미처 몰랐다. 사람이 한 공간 안에 50시간 동안 갇혀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버스로 우수아이아를 갈 생각이야? 비행기를 타는 게 좋을 텐데…."


부에노스 아이레스 호스텔의 직원은 떠나는 날까지 만류했다.


"난 체 게바라가 여행한 것처럼 육로로 남미를 여행할 거야. 비행기를 타는 순간 모든 의미가 사라져 버릴 거라구. 그리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는 그 시간들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해. 비행기가 보여주지 못하는 아르헨티나의 풍경들을 버스는 보여줄 테니까!"


"내 이름은 페드로야. 잘 기억해 둬. 버스에서 넌 '페드로'라는 이름을 500번 정도 외치게 될 거 거든."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이과수 폭포가 있는 마을까지 갈 때도 24시간 정도 버스를 탔다. 힘들었지만 아주 못할 정도의 경험은 아니었다.


'24시간 버스를 두 번 정도 탄다고 생각하지 뭐'하고 50시간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난 정말 페드로의 이름을 500번 정도 외치게 되었다.


'페드로 말을 들을 걸. 페드로는 지금 쯤 웃고 있을까? 페드로 나쁜 새끼. 페드로 망해라. 페드로, 페드로, 페드로!'


50시간 타는 버스는 질리는 걸 넘어서 창문을 깨고 도로를 향해 뛰어내려 어딘가로 무작정 질주하고 싶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버스 안에는 나와 비슷한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표정으로 이틀을 꼬박 버틴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티모시

네덜란드에서 온 티모시와 루크.


티모시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은 암스테르담 출신의 셰프였고, 루크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위트레흐트에서 고생태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나와 티모시가 먼저 친해졌고, 마지막으로 루크까지 합류하게 되었다. 우수아이아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다. '정말 50시간을 타고 오다니.'


2번의 검문이 있었고 총을 멘 군인들이 버스에 올라 여권 검사를 했다. 커다란 총이 머리 위로 지나다니면 잘못한 게 없어도 몸을 움츠리게 된다.


새벽 3시, 시동이 꺼진 탓에 버스를 갈아 탄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갈아탄 버스는 한참을 달리던 중, 프런트에 불이 붙었다.


버스 기사는 모두 내려야 된다며 소리쳤다. 잠에서 깬 승객들 중 누구 하나 투덜대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여긴 남아메리카잖아!"라고 말하며 웃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에서 총 4번의 짐 검사도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우수아이아까지 가는 길은 같은 아르헨티나 땅이었지만 칠레를 지나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우수아이아에 도착했다. 우수아이아에 내린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안도감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생각했다.




루크

어떤 순간들은 너무 인상적이어서 머릿속에 평생토록 각인되기도 한다.


버스에서 내린 뒤 "How are you?"라고 묻는 티모시의 말에 답하던 루크의 표정. 그 표정이 내게 그러했다.


루크는 정말 해맑은 얼굴로 "I'm good, I'm good!"이라 답했다. 순간 '내가 뭘 잘못 본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50시간 동안 버스를 탄 뒤 보이는 저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 그게 루크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나중에 이 표정 때문에 적이 될 줄… 이때는 꿈에도 몰랐지.)



둘은 네덜란드인이어서 네덜란드어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내가 있을 때는 영어를 사용해 대화했다. 성격 급한 루크가 때때로 네덜란드어를 사용해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티모시는 영어로 답했다. 그럼 루크도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영어를 정말 잘하고 사려 깊다. (구두쇠라는 선입견이 있다는데 … 그건 잘 모르겠다.) 영어로 말할 때도 다른 유럽인들과 달리 모국어 억양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 '미국인인가?' 싶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또 특징이라면 다른 유럽인들과 달리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체성이 없는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부드럽고 배려심 깊고 따뜻한 사람들. 내가 여행 중 만난 대부분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랬다.




우리 셋 중 누구도 숙소를 예약한 사람은 없었다. 티모시가 론리플래닛을 뒤져 가깝고 평도 좋은 호스텔을 찾았고 나와 루크는 티모시를 따라갔다. 밤 12시 전이었는데, 시골 마을의 하루는 일찍 시작되고 일찍 마무리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호스텔은 잠겨 있었다. 벨을 두 어번 누르자 자다 깬 얼굴의 직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같은 방에 배정이 되었다.


내 남미 여행의 커다란 목표 중 하나였던 우수아이아.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그곳에 드디어 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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