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팡동이


7년 동안의 연애가 끝났다. 그리고 난 외쳤다.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배낭 때문이야!"


배낭만 잃어버리지 않았어도. 배낭만 제때 상파울루에 도착했어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어떤 도시부터 이야기해야 이 모든 여정을 가장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사실 세상 모든 일들은 정확한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다. 여행도, 관계도, 감정도.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정확히 시작된 순간과 끝나는 순간을 알고 싶어 하지만 - 그런 건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딱 떨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건 그저 인생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하는 우리 욕심이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에 가깝다.



그래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이 모든 게 시작된 순간.


남미에 가겠다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22살부터 그 출발점을 잡아야 할까. 아니면 그 이전, LA에서 볼리비아 커플- 핵토르와 클라우디아를 만난 일부터? 그것도 아니면 체 게바라 평전을 읽었던 고등학생 시절?


잘 모르겠다. 남미 행 비행기에 오른 건 그냥 이 모든 게 다 모여 운명처럼 일어난 '사건'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배낭 하나 짊어 메고 떠난 3달 동안의 여행이 앞으로 내 10년을 바꿔 놓을 것이란 것을. '나'라는 사람을 통째로 바꾸고, 새롭게 만들 것이란 걸.


그러니까 -



어릴 적부터 아주 특별한 삶을 살고 싶었던 나에게 체 게바라와 하루 차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늘 커다란 위로였다. 평전을 읽다가 나도 체 게바라가 남미를 여행했던 만 23살 나이에 똑같은 루트로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행 갈 돈을 벌었다. 떠나는 날 새벽까지 종로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는데 - 아빠가 제정신이냐며 화를 냈다. ‘어차피 3달 뒤에 돌아올 텐데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생각했지만 - 지금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도쿄와 휴스턴을 경유해서 상파울루로 들어가는 비행기였고 35시간이 꼬박 걸렸다. 동일본 지진 탓에 나리타 공항은 천장도 무너지고 곳곳에 펜스가 쳐져 있어 '곧 세상이 멸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브라질에 도착했는데 배낭이 사라졌다. 배낭 하나 가지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그게 도착하지 않았으니 - 아침에는 한국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울고, 밤에는 그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 계획을 짜도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긋난 계획 안에서 삶이 내게 주는 것들이 진짜 의미 있는 것들이란 사실도 배웠다.



그때는 동일본 지진이 있었고,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고. '세상은 늘 망할 듯 망하지 않고 잘 흘러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새벽까지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반대로 내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노는 순간에도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 반대의 계절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남미에는 나 말고도 체 게바라가 되고 싶어 온 친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게 나를 좌절시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그리고 페루까지. 3달 동안 여행을 했지만 - 의대생에서 혁명가가 된 체 게바라처럼 내 삶은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았다. 그 대신 남자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그 이후 3번 더 남미를 갔다.




다니엘, 나는 앞으로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겠지.


우리는 7년이란 시간 동안 한국과 일본, 중국과 몽골, 캐나다와 콜롬비아, 쿠바와 미국 등을 함께 여행했다. 그리고 이별을 했다. 더 이상 함께 가고 싶은 나라가 없었거나, 서로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거나. 서로가 너무 버거웠거나. 혹은 이 모든 게 다 합쳐져 내린 결정이었거나.




이별 후 나는 처음으로 유럽에 갔다. 8년 만에 혼자 배낭을 메고 떠난 여행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대륙에 가보고 싶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프랑스를 갔고. 그 다음 해에는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크로아티아를 갔다.




"네가 여행한 곳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


아주 오래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늘 겁이 났다. 너무 사랑해서 겁이 났다. 너무 사랑하는 것들은 손을 대기 조차 겁이 난다. 아름답게 빛나던 것이 내가 손을 댄 탓에 차갑게 식어버릴 것만 같아서.


'내가 그만큼 매력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을 조금은 접어두고 써보려 한다.



내가 여행한 곳들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했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