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뜨거운물 찬물 Nov 30. 2021

<옥케이, 벨라이스>13부 이별

개인의 서사로 우리의 삶을 비추다

2001년 1월     

제대를 한 달 앞두고 독일에 있는 행님에게 메일을 보냈다.      


“행님, 우진이에요. 독일에 가서 잭러셀테리어를 분양받고 싶어요”   

  

“비행기표와 유레일 패스를 보내주시면 나중에 돈 벌어서 갚을게요.”    

 

결국 비행기표와 유레일 패스는 인영이 누나가 종로 ‘탑항공’에서 끊어 줬다. 출국 하루 전날 독일행이 결정되었고, 광렬이랑 짤봉이랑 PC방에서 만났다. 대충 유럽 여행 일정을 짰으나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뭐 될 대로 되겠지, 행님이 있으니까 일단 가서 해결하자!”     


프랑크푸르트행 아시아나 항공은 굉음을 올리며 날아올랐다. 나는 비행기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서 여권을 빼앗길 뻔도 했다.      


“에이~ 다 알고 왔으니 술 좀 더 주세요”라며 스튜어디스에게 사정도 했다. 독일에 거의 도착할 때쯤, 한 스튜어디스가 나한테 물었다.      


“유학생이시죠? 프랑크푸르트는 어디가 볼만해요?”

    

“저…저요? 저도 처음 가는 건데요.”   

  

노랑머리였던 나는 “현지인”으로 오해받았다.     

 


“Where is your hotel?”     


“Duselldorf”     


“oh~ there is rich town”     


“Are you rich?”     


“…,…,…,…,…,…,…”     


“No, I am hungry”


“…,…,…,…,”    


“What? are you kidding me?”
 

짤봉이의 개드립 때문에 우리는 공항에서 체포될 뻔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형에게 전화를 해야했지만 공중전화 쓰는 방법을 몰랐다. 짧은 영어로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매번 실패했다. 또 환승하는 게이트도 못 찾아 우리는 꼼짝없이 4시간을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운좋게 한국 사람을 만나서 뒤셀도르프행 비행기에 탈 수 있었고, 엄마의 김치통과 함께 도착하니 행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탔다. 독일은 택시도 벤츠였다.      


“We go to miabush struiump.”     


첫째 날 우리 넷은 짐도 안 풀고 맥주와 와인을 퍼마셨다. 술이 부족할까 봐 술을 먹기 전에 아우토반을 달려 휴게소에서 술을 더 사 왔다. 그때는 휴게소에서 술을 팔았고, 와인은 페트병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맛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술을 때려 넣은 촌놈들이었다.    

  

다음날, 우리 셋은 유레일 패스로 여행 동선을 어떻게 짤지 연구했다. 14박 15일 동안 가장 최적합한 동선을 짜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very hungry” 하기 때문이다.      


우선 행님의 아우디 A6를 타고 가까운 하이델베르크 성, 쾰른, 피센 등 독일을 구경했다. 그 다음 날은 네델란드로, 또 다음날에는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에펠탑까지 갔다.      


    

# 유럽의 역사     


그런데 매우 이상했다.

유럽은 국경이 없었다. 그냥 도로를 달리다 보면 <여기부터 오스트리아입니다>라는 표지판이 국경을 대신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국경이 바뀌자마자 다른 인종, 다른 눈 색깔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나왔다. 왜일까? 그것은 유럽의 역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독일에 있는 동안, 지금 유럽 국경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열심히 공부했다.

      

드디어 유레일 패스를 타고 긴 여정을 떠날 날이 밝았다. 우리는 큰 짐가방에 '전기밥솥'과 마른 반찬을 싣고 기차에 올랐다. 밥솥은 모든 요리가 가능한 만능 조리기구였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 독일의 뮌헨 → 로텐부르크 → 이탈리아 베네치아 → 피렌체 → 나폴리 → 폼페이 → … →로마→ …     


서남부 유럽을 샅샅이 구경했으며 그 중 압권은 로마의 대전차 경기장과 콜로세움이었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헬로우 치코  


광렬이와 짤봉이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본격적으로 독일의 ‘개농장’을 찾아 나섰다. 약 한 달 후 퀄른 인건 부포탈에서 아주아주 잘생긴 3개월 된 수컷 “잭러셀테리어”를 만났다. ‘군계일학’이라는 말처럼 독보적으로 잘생긴 남자아이였다.     

 

그 이후로 열 번 정도 그 농장을 찾았고. 운 좋게 그 아이를 분양받을 수 있었다. 독일은 아무에게나 강아지를 분양해 주지 않는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시간, 그 사람의 재력, 강아지를 돌볼 사람 등 모든 것을 꼼꼼하게 심사해서 분양한다. 나는 개를 먹는 한국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강아지를 분양받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농장을 찾아서 나의 진심을 전했다. 나와 행님은 그 남자아이를 “치코”라고 이름 지었다.   

   

치코를 데려와서 행님네 집에서 1개월 정도 적응기를 거친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독일은 광견병 주사를 맞고 1개월이 지난 후에 항체가 형성된 것을 확인해야 출국할 수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시아나 비행기에 치코와 함께 올랐다. 케이지 무게까지 8kg이어서 치코의 비행깃값이 110만 원이 나왔다. 화가 나는 것은 나보다 비싼 비행깃값을 치렀는데 자리도 없고, 밥도 안 줬다. 그래도 치코는 씩씩하게 11시간의 비행을 잘 견디어 줬다.      



# 보라매공원     


친구 헌수가 인천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진짜 개를 데리고 왔네?”
 
“너 진짜 개에 미쳤구나?”

    

“ㅋㅋㅋ 그렇긴 하지.”     


“난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치코를 데려왔다. 하하하.”   

  

집에 오니 부모님과 큰누나가 치코를 반겨줬다. 치코는 매일 새벽, 저녁 2번씩 보라매 공원에 가서 산책과 용변을 봤다. 절대로 집에서 오줌을 싸지 않았다. 치코는 강철 이빨과 떡~벌어진 어깨를 가졌다. 보라매공원 야생들고양이들을 단번에 낚아채 물어 죽이는 일도 많았다.


어느 날 고양이 사체를 나한테 물고 왔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혼을 냈고, 치코는 항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고양이를 잡아 왔는데, 왜 혼을 내지? 난 내 할 일을 한 것인데….   
  


이런 표정이었다.      

그 당시 나는 청담동, 논현동에서 애견 포탈샵의 실장으로 일했다. 애견샵, 호텔, 미용, 병원, 카페 등등 20년 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템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해 돈까지 벌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부회장으로 있던 잭러셀테리어클럽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치코빠(정우진)은 개장수이다. 우리 클럽 운영진으로 인정할 수 없다.”   

  

잭러셀테리어 클럽은 거의 내가 만든 것이고, 수익사업도 하지 않았다. 가끔 모여서 강아지들 산책시키는 모임이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좋아하는 일이 없(業)이 되면 안 된다.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돈을 벌어서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 해라”라는 아부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클럽을 탈퇴했고 애견샵도 그만뒀다.    

       


#굿바이 치코          


치코나이 12살 되던 어느날 아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치코가 죽은 거 같다.”     


“왜요?”     


“모르겠다. 일단 집으로 와라.”     


아침 산책을 하러 1층에 갔다가 집에 놓고 온 게 있어서 잠깐 5층에 다녀와 보니 치코가 없었다고 한다. 허리가 아픈 엄마는 절뚝이며 치코를 찾았고 150미터쯤 떨어진 인도에서 쓰러진 치코를 발견했단다.    

  

교통사고는 아니다. 외상이나 피 흘림이 없었다. 그냥 뜬 눈으로 혀를 깨물었다. 분명히 삽 같은 무기로 한 방에 죽은 모양새였다. 나와 엄마는 그 살인자가 동명파레스 경비라고 확신했다. 치코를 묻기 위해 박스와 삽을 빌리러 갔을 때, 그 이유 모를 미소를 띠던 그 살인마를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엄마는 그 후로 경비실 앞으로 지나갈 때마다 “내 불쌍한 치코, 너 이 새끼 죽일 놈, 내 손으로 죽인다”라고 되뇌셨다. 그 경비가 아부지의 죽음 방치한 놈이었고, 치코까지 죽인 것이다. 그 새끼는 얼마 후 뇌출혈로 죽었다.      


인영이 누나는 치코를 안고 3일 밤을 울면서 샜다. 삼일장을 치른 치코를 위해 다이소에서 가장 비싸고 튼튼한 박스를 샀다. 치코의 입관이 통곡 속에서 끝나고 박스테이프로 칭칭 수십 번을 감쌌다. 야생 고양이가 못 뜯어 먹게….      


2014년 1월 5일 보라매공원에서 가장 양지바른 곳에 치코를 묻었다. 겨우내 언 땅이 잘 파지지 않았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약 1m를 팠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흙을 덮었다.    

      

잘 가라 나의 아들

아빠는 너만 생각하면 눈망울이 구슬처럼 흐려져   
니가 태어난 ‘독일 부포탈 초원’에서 마음껏 뛰어놀아라. 나의 치코

2001~2014 Chico


이전 12화 <옥케이, 벨라이스> 12부 화악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