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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Oct 22. 2021

모두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어차피 부품이 될 거라면

<(나의) 노동의 미래> #05



6번의 퇴사, 그중 3번의 해고를 겪은 후 입사한 곳은 스타트업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다. 성희롱 진정서 제출 후 해고당한 광고 회사와 마지막 회사인 스타트업 사이에 2번의 퇴사가 또 있었고 그중 한 곳은 미련하게도 전에 다녔던 여성지였다. 또 한 번 제안이 왔던 것이다. ‘지금 받는 만큼 줄게. 와서 좀 일하면 정규직도 시켜줄게’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나. 정규직을 담보로 ‘프리랜서 상근 에디터’로 일하며 갖은 맘고생을 했으면서 나는 또 프리랜서 상근 에디터가 되었다. 내가 앉게 된 자리는 출산 휴가를 간 선배의 자리였다. 선배의 빈자리를 채우며 6개월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비정규직 프리랜서 상근 에디터였다. 정규직을 시켜준다고 하지 않았냐는 내 물음에 회사는 ‘월급 많이 받는데 뭐가 문제냐’고 했고, ‘아이 낳고 회사 생활 어렵지 않겠니. 조금만 기다려 봐. 곧 자리 생길 거야’라고 했다.



광고 일을 하며 충족되지 않는 잡지 일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나는 다시 잡지사에서 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곳에서 정규직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막역했던 선배의 육아가 힘들기를,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길 바라는 것도 싫었다. 그때 마침 팀을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사보를 하청 받아 만드는 팀으로 옮겨갔다. 옮긴 팀은 정규직을 뽑고 있는 자리라 바로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틀렸다. ‘미안. 내가 잘못 알았네. 티오가 없대. 일단 계약직으로 일 년 동안 일해야 한대. 어떻게 하고 싶니?’



프리랜서 상근 에디터에서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지만 계약직으로 일 년 동안 일한다고 무조건 정규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일 년은 정규직이 될만한지 회사가 나를 평가하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계약직을 1년 동안 할 것인지 혹은 회사를 그만둘 것인지 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그저 스스로를 탓하며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회사를 나가지는 못한 채 얼마간이 흘렀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렇게 고민하던 시기에 오랜만에 광고회사로 나를 불렀던 전 직장 상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또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요즘 뭐하니? 내가 회사를 차렸는데 너 나랑 일해볼래? 정규직이야’ 나는 두말하지 않고 이직했다.



새롭게 일하게 된 사무실은 테헤란로에 위치한 수많은 공유 오피스 중 하나였다. 내가 다녔던 그 어떤 회사보다 좋은 사무환경을 갖췄다.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커피와 맥주, 새 책상과 넓은 라운지 그리고 소음이 완벽히 차단되는 화장실. 그곳에서 이제 대표님이 된 ex-상사와 함께 단 둘 뿐인 회사를 꾸려나갔다.



사실 업무 환경보다 좋았던 것은 이곳에서는 대표와 함께 업무의 주도권을 잡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이 매체가 뿌리인 우리는 함께 여행 에세이를 만들고 여행 강의와 상품도 만들었다. 20년이 넘게 잡지 편집장으로 세계를 누볐던 대표가 그 노하우로 럭셔리 여행 상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맨땅에 헤딩하듯 1년이 흘렀고, 1년 동안 뿌려놓은 씨에서 곧 싹이 터야 할 참이었다. 그때 코로나19가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모든 여행사가 그러했듯 우리에게도 위기가 찾아왔고 그렇지 않아도 1년 간 무리하게 투자하고 있던 회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번째 해고를 당하게 됐다. 에디터로는 이루지 못했던 세계를 누비며 일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제야 이루나 싶었으나 역시 세상일은 예측할 수 없었다. 꿈을 좇아도, 안정을 좇아도, 돈을 좇아도 고용불안은 눌어붙은 껌딱지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회사는 내편이 아니었다.


  




생애 첫 스타트업 입성


해고 통보를 받기 며칠 전 우연하게도 한 스타트업을 발견했다. 온라인 강의 플랫폼이었다.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 강의 시장의 팽창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내가 그 회사에 흥미를 갖게 된 건 그들의 전망이 아닌 그들이 내 건 슬로건 때문이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와 현실 사이에서 끝없는 핑퐁을 해오던 내게 이 말은 계시처럼 느껴졌다. ‘저 회사에 가야 해! 그럼 나도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거야!’



면접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서류전형, 과제 전형, 직무면접 마지막으로 컬처 면접까지 총 4단계를 거쳤다. 그리고 3개월의 수습기간을 거친 후 팀원들의 평가를 합산해 최종적으로 정규직 전환이 결정된다. 일도 잘해야 하고 조직에서 모나지도 않아야 했다.



전체 채용의 과정 중 컬처 면접이란 것이 가장 독특했는데 조직에 어울리는 인재를 찾기 위해 직무 외 부분을 심사하는 면접이다. 신생 스타트업이지만 그 안에서 나름 장기근속하고 컬처적으로 회사와 동기화되어있다고 평가된 직원이 면접관이다. 이들은 직무 적합성보다는 일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주로 물었다. 기성 회사와 달리 수평적인 문화와 독특한 사내 분위기로 인해 거치는 필수 과정인 듯했다.



면접은 30분이 넘게 이어졌고 두서없이 오갔던 많은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말이다. ‘워라밸은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자율 출퇴근제의 회사였던 터라 직원 스스로가 업무를 어떻게 핸들링하느냐에 따라 워라밸은 지켜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무사히 컬처 면접에 합격했고 생애 첫 스타트업 생활을 시작했다.    



생애 처음으로 맛 본 수평적인 조직 문화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평어’라고 칭하는 반말로 대화했고 회의에서는 모두가 가감 없이 의견을 교류했다. 슬랙(사내 커뮤니케이션 도구)에서는 모두가 친구처럼 소통했고 모든 업무는 노션(메모 앱 기반 워크 스페이스)으로 정리했다. 나는 새로운 조직 문화와 더불어 새로운 업무 툴을 배웠다. 모든 것을 종이로 프린트해 소통하던 이전 직장들과는 업무 방식이 달랐다. 회의에 필요한 것은 인쇄된 보고서가 아닌 wi-fi 비번이었다. 첫 스타트업 근무는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 <인턴>이 떠오르기도 했고 미국 HBO의 시트콤 <실리콘밸리>가 연상되었다가 엠마 왓슨 주연의 영화 <더 서클>을 보았을 때는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도 나는 자기 주도적으로 일했다. 수평적인 조직인만큼 팀의 목표를 설정하고 관리하는 ‘리드’라는 직급은 있었으나 업무지시를 내리는 상사는 없었다. 나는 콘텐츠 제작팀에서 PD로 일했는데 온라인 강의를 만드는 일이 주 업무였다. 강사와 미팅을 하기도 하고 촬영도 했지만 가장 비중이 컸던 일은 강사가 만든 영상을 검수하는 일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영상을 봤다. 강사와 일정이 잘 맞지 않을 때는 영상이 밤늦은 시간에 전달되기도 했고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밤을 새우고 영상 검수를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자기 주도적으로 내가 선택한 일이다.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업무는 늘어났고 새벽까지 일하는 빈도수도 늘어났다. 회사에 12시간 동안 있는 날도, 14시간, 16시간 동안 있는 날도 늘어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출근했고 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퇴근했다. 잡지사에서 근무할 때는 고된 마감기간을 지나면 며칠 간의 여유가 생겼는데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것은 마치 마감이 없는 마감을 계속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새벽 2시면 자동으로 꺼지는 회사의 전등이 누군가에 의해 다시 켜질 때면 ‘스타트업의 일주일은 보통 사람의 한 달이다’라고 쓰인 포스터가 더욱 눈에 띄었다. 보통 사람이 한 달 동안 할 업무를 일주일 동안 하고 있었다. 나는 새벽에도 회사에 있었고 주말에도 회사에 있었다. 그리고 1월 1일 새해가 밝을 때에도 회사에 있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는 일을 사랑해야만 했다.



전도유망한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싶었던 이유는 성장하는 회사에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소속된 나도 상승할 거라 믿었다. 내가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공포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 나도 성장할 것이고 회사의 매출이 오르는만큼 내 연봉도 오를 것이라 믿었다.



연봉은 나쁘지 않았다. 일한 만큼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지만 내 과거의 연봉과 비교하면 대단히 먹고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짠테크를 겸한 덕에 카드값과 마이너스 통장 때문에 빌린 1천5백만 원에 달하는 제2 금융권의 빚도 1년 만에 모두 갚았다. 이제 적금을 부어 전세의 꿈이라도 꿔볼 수 있을 터였다. 앞날은 밝았다. 공예와 미술 분야의 전문성으로 회사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었고 팀원들과도 무난히 지냈다. 벅찼던 업무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입사한 지 13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퇴사를 결정했다.



‘워라밸은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와 더불어 컬처 면접에서 기억나는 말이 있다. 내가 했던 말이다. 회사에 원하는 것이 있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직원을 부품처럼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급여의 대가로 일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요’라고 답했다.



스타트업의 일주일이 보통 사람의 한 달과 같듯이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일 년이 되지 않은 시간 동안 팀원의 절반 이상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업무의 구멍 없이 팀은 잘 돌아갔다. 빈자리는 금방 대체되었고 이 사람이 아니면 저 사람이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회사는 수많은 선택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선택지를 가졌다. 나는 회사의 부품이다. 어차피 부품이라면 내가 어떤 기계의 부품이 될지는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었다.



1년이 넘는 팬데믹으로 언택트 시대는 본격화 되었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배웠다. 나는 더 나은 조건의 직장에 다니기 위해 다시 한번 퇴사를 결심했다. 자신만만하게 회사를 나왔다. 퇴사 후 한 달 정도 휴식한 후에 이력서를 수정하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해서 이직을 하는 것이 퇴사 당시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상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만성적인 피로와 심각한 번아웃에 시달리고 있었고 직장 생활에 대한 거부감이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나는 망가진 부품이 되었다. 과연 나는 다시 제대로 된 부품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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