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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운 Sep 30. 2022

"전화선 너머로
사람 만나는 건 그만하려고”

안드레스(Andres) / 멕시코 멕시코시티 / 투어 가이드


중남미 여행의 시작점.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서고 또 떠나가는 도시.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성지이자 베이스캠프. 이 거대한 도시에는 세상 만사가 모두 담겨있다.

 

멕시코시티의 중심부인 소칼로(Zocalo)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대성당이 나직하게 서있다.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그들이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이곳에 살던 아즈텍 사회의 거대한 신전을 부수고, 바로 그 자리에  대성당을 세웠다.


아픈 역사 때문인지 대성당은 낮에도 밤에도 슬픈 향을 머금고 있다. 웅장함과 쓸쓸함이 번갈아 스쳐 지난다. 날씨 변덕이 심한 멕시코시티, 어스름이 깔릴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뎅, 뎅, 퍼져나가는 종소리가 빗물을 머금은 탓인지 체념처럼 무겁다.

 

대성당 왼편으로 꺾어 골목에 들어서면 눈앞으로 호스텔의 파란 간판이 보인다. ‘온 세계의 청년’(Mundo Joven)이라는 이름을 가진 호스텔이다. 6층 건물 전체를 통으로 호스텔로 사용하는 이곳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무수한 사연들이 머물러 간다.


"땡고 레세르바, 우나 뻬르소나 (tengo reserva, una persona)..."


갓 도착한 사람들이 서툰 스페인어로 체크인을 하고 있다. 호스텔 곳곳에 붙은 종이가 눈에 띈다.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나요? 안드레스에게 문의하세요.”


호스텔서 스페인어를 배운다니, 여행자들의 천국답다. 수업료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시간당 얼마, 하는 식으로 따져 돈을 받진 않겠다는 뜻이다. 안드레스라는 청년에 대해 궁금해진다. 그는 왜 이곳에서 수업료도 안 받고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는 걸까.     



photo by Unsplash


멕시코에 도착한 다음날, 제일 먼저 찾은 것은 피라미드였다. 이집트도 아니고, 멕시코에서 피라미드라니?


멕시코시티에서 차로 한 시간. 북동쪽으로 달리면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이 나온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를 만나볼 수 있는 유적지다. 기원전 2세기경에 지어진 고대도시는 기원후 7세기까지 융성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급격히 쇠락했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테오티우아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죽음의 길'(죽은자의 길)을 만난다. 그 시절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이동시키던 길이다. 폭 45m, 길이 3km에 달하는 길. 길을 가로막는 돌벽들이 세워져 있는데, 허벅지를 넘는 높이의 계단을 몇개씩 오르고 또 그만큼 다시 내려가야 겨우 돌벽 하나를 넘어갈 수 있다. 위압감과 무력감에 다리에 힘이 빠진다. 땡볕 여름에 이 길을 걷다 내가 죽겠다 싶었다. 죽음의 길,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


죽음의 길 정중앙엔 태양의 피라미드가, 맨끝에는 달의 피라미드가 초연하고 묵직하게 놓여있다. 피라미드를 오르는 사람들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마치 삼각김밥에 올라가는 개미들 같다.


우선 달의 피라미드부터 올라 본다. 경사가 어찌나 가파른지 그 어떤 날고 기는 인간도 네 발로 기어서 오를 수밖에 없다. 등뒤로 낭떠러지가 있다는 생각에 자꾸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아, 괜히 오르기로 했다. 열댓번쯤 생각했을 때 정상에 도착했다. 달의 피라미드에서 내려다 본 죽음의 길은 눈을 마주치면 안될 것 같은 경외로운 힘을 내뿜고 있었다. 그 옆에 태양의 피라미드는 인생을 담아 서예를 연마하는 노인의 등처럼 호젓하게, 지난 이천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이곳이 왜 세계 여행자들이 블랙홀이 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도시 곳곳에 켜켜이 쌓인 무수한 시간들이 특별한 아우라를 더해준다.




다음날 아침, 오늘은 뭘하지 싶어 로비에 붙은 커다란 지도를 보고 있는데, 한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건다. 곧 호스텔의 무료 워킹투어가 시작한단다. 웬만큼 큰 도시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워킹투어는 한 도시를 빠르고 깊게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청년을 따라 나서자 이미 세계 곳곳에서 온 여행자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다.


친절한 인상의 가이드가 앞으로 나선다.


“안녕, 내 이름은 안드레스야."


대가도 없이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안드레스가 누군가 했더니, 바로 오늘 워킹투어의 가이드다.


"오늘의 투어는 무료야. 너희한테 멕시코시티라는 커다랗고 정신없는 도시의 치명적 매력을 알려주고 싶어. 두어 시간이 금방 갈 거야. 다들 끝까지 가는 거지?”


크지 않은 체격의 그지만 든든한 말투와 노련한 투어 진행에 믿음이 간다. 투어에는 호주, 볼리비아, 프랑스, 이스라엘 등 각국의 청년들이 모였다.


저 뒷 편에서 은은하고 웃고 있던, 샬리마르가 귀엽게 투정을 부린다. 그는 안드레스의 고등학교 친구다.


“아니 글쎄, 얘가 나한테 말도 없이 여기서 일을 시작한 거야. 원래 안드레스가 샌디에고에 간다 그랬거든. 당연히 샌디에고인 줄 알고 지난주에 어디냐고 물어봤는데, 그제야 여기 있다고 말해준 거 있지.”


오랜 내공의 소유자 같았던 안드레스는 사실 여기서 일을 시작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멕시코 북부도시 디후아나에서 자란 안드레스는 대학 졸업 후 미국 샌디애고의 콜센터에서 일을 시작했다.


17개월 넘도록 착실히 일하던 그는 지난 3월, 멕시코시티에 놀러왔다가 갑자기 여기 눌러앉았고 호스텔에서 일을 시작했다. ‘온 세계의 청년' 호스텔에 머물면서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워킹투어의 가이드를 하고, 가끔은 리셉션에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게 어떤 것이든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직업을 택하고 싶어. 번역가, 가이드, 스페인어 선생님 같이.”


그는 어떻게 해야 학생이 스페인어를 잘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알 것 같다고 말한다. 학생이 스페인어를 배우고, 실력이 부쩍 늘어 다시 이 넓은 대륙을 향해 여행을 떠나게 될 때, 그는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따로 수업료를 책정하지는 않았다. 팁을 준다면? 물론 땡큐다.


“샌디애고 콜센터에서 일할 때 말야. 모든 것은 반복되고 있었고 나는 매일 같은 일을 했어. 여기에서처럼 즐겁고 행복하지 않았어.”

“하지만 돈은 충분히 벌었을텐데, 미국에서 말야.”

“돈이야 지금보다 많이 벌었지만. 그때 나는 아무 것도 도전할 필요가 없었고, 사람도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 모든 것은 매일 똑같았지.”

“그걸 벗어나고 싶었구나.”

“응. 남은 인생동안에는 한계에 부딪쳐보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살아보고 싶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끝까지 가볼래.”


당장 먹고 살만한 돈만 벌어도 괜찮겠냐고 물으니 싱긋 웃는다. 더 벌어서 뭐하냐는 거다.


“그래도, 사람들이 돈을 모으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다들 저축 하고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걸?”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안드레스는 입을 연다.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돈을 모으는 사람들은... 돈을 버는 방법을 알아서 그런 거 아닐까?”


돈을 모으는 이유가 돈 버는 방법을 알아서라니,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안드레스가 계속해서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무심코 해봤는데 우연히 돈을 벌게 된 거야. 처음에는 돈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재밌어서 계속 모으는 거지. 거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엔 잃는 게 두려워져서 계속 돈을 모을 수밖에 없게 되는 거야. 모으는 방법만 알았지, 잃는 방법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지. 돈을 왜 모으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어느새 잃어버린 거고”      


안드레스는 자신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통장 계좌에 쌓여있는 돈이 아니라고 믿는다.


"돈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뭐하나 보면 캐비어 사먹고, 소고기 스테이크 사먹더라고. 근데 난 그런 걸로 행복해지지 않아. 차라리 다른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는 데 도움되는 일 할래."




“부모님은 뭐라셔?”


“부모님? 부모님은 내가 연락이 없으면 잘 지내겠거니 생각 하시거든. 내가 어쩌다 전화라도 하면 돈이 필요한 줄 아시곤 해. 하하.”      

집을 떠나온 탕아처럼 쿨하게 말했지만, 안드레스는 평생을 소원하는 '버킷리스트'가 있냐는 질문에 부모님이 건강하시도록 돕는 것을 첫 번째로 꼽으며 눈시울을 붉힌다.


쑥쓰러운 듯 화제를 돌려 다른 소원들을 말하던 안드레스. 세계의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도 싶다고 말하다가 황급히 덧붙인다.

"물론 지금 내 드림 플레이스는 여기야, 멕시코시티. 난 이 도시가 정말 좋거든."       


즉흥의 아이콘 같아 보이는 안드레스도 나름대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 4년 후엔 한국에 있고 싶다며 눈을 반짝인다. 그는 이듬해 1월에 다시 샌디애고로 돌아갔다가 곧 유럽으로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그걸 시작으로 온 세계를 돌아다니려는 안드레스의 최종 목표는 자신의 호스텔을 여는 것.      


“10년 후에 나?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을 거야. 7년 후에 호스텔을 차릴 거거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쫓고 있는 안드레스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덕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를 끌어내보고 있잖아. 아니라면 몰랐을 열정 같은 거? 전에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걸 할 수 있게 됐어. 이거 봐, 내가 지금 너랑 이런 신기한 인터뷰를 하고 있잖아?”    

  

여기서 일하면서 안드레스는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으로 웹 포스터까지 만들게 되었다. 디후아나에서 살던 고등학생 때, 심심풀이로 혼자 배워본 프로그램을 어디선가 활용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샌디애고의 콜센터에서는 절대 사용할 일이 없었으니까. 6개월 전의 안드레스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그에게 하루가 다르게 일어나고 있다.


40년 후의 모습을 묻자 안드레스는 생각에 잠긴다.

“40년이라……. 역시 내가 차린 호스텔에 살고 있겠지. 호스텔 한편에다가 내 자리를 하나 마련할 거야. 그곳에서 책을 원 없이 읽을 거야. 또 내 호스텔에 머물다 가는 사람들 얘기도 듣고, 가끔은 조언도 해주고. 따뜻한 차나 시원한 맥주를 마시다가, 가만히 편지를 쓰고 싶어.”     

 

예고 없이 비가 쏟아 붓고 그치길 반복하는 멕시코시티. 안드레스는 오늘도 등 뒤로 장우산을 꽂은 채 세계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워킹투어의 길을 앞장선다.      


“오늘 투어는 정말 재미있을 거야. 다들, 끝까지 가는 거 맞지?”            



- Mexico City, Mexico

- 인터뷰 날짜 : 2015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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