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과 냉장고 발명자에게 사비를 털어 노벨 발명상을 수여하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날의 연속이었다. 평소 만 오천보 정도는 거뜬히 걸었던 아빠는 부족한 걸음수를 채우느라 늦더위 속으로 들어갔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막내를 구슬려 걷기에 동참시키고 노을을 마주했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은 낭만적인 저녁놀이라는 선물에 인색했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세상의 어떤 법칙보다도 분명하고 거짓이 없었다.
산책 중에 아들과 아빠는 온갖 상식적인 질문과 난센스에 가까운 선문답을 주고받는다. 요즘 아이들은 보고 들은 게 많아서인지 문답 수준이 만만치 않다. 더욱이 유튜브라는 강력한 지원군이 있어서 얇고 넓은 상식의 세계를 보여준다.
말간 노을 사이로 비행기가 떠가고 있었다. 무심하게 아빠가 물었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시소 위에 동일한 무게의 수박과 얼음덩어리를 올려놓고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
아들은 마른하늘을 쳐다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음 ᆢ 아마도 시소가 수평으로 되지 않을까."
아빠는 이유를 설명해보란 듯이 아들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것은 여름은 뜨거우니까 얼음이 쉽게 녹을 것이고. 얼음이 녹아서 작아지면 시소가 수박 있는 쪽으로 기울어져서, 아마도 수박이 굴러 떨어지겠지."
(똑같은 질문에 적잖은 어른들은 수박 쪽으로 기운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은 보통 문제를 직관적으로 바라보지만, 어른들은 문제 어디에도 없는 조건이나 자기만의 상황을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들의 대답에 만족해하며 다시 연속된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러면 시소가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쳐다보며) 음.. 시소는 서로 몸무게를 맞춰서 타야 하니까, 균형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을까ᆢ"
아마도 그러겠지.
"시소는 기움이 아니라 균형을 위해 존재하고 배려를 통해 역할을 다하겠지."
저 멀리 노을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잠시나마 시원한 바람이 어린 현자의 머리카락을 흔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관계 중 균형을 말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엄격한 조직 사회라 할지라도 자신의 직책과 권한 범위 내라는 한계가 있어 나름의 균형점이 존재한다. 오직 핏줄과 정으로 맺어진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그 유일한 예외라 할 수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양자 간의 처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는 균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균형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부모 자식 간 문제가 좀 더 근본적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경제적인 문제가 주를 이른다. 십 대들의 사교육부터 청년 취업의 문제까지 부모들의 경제력에 따른 다양한 상황이 존재한다. 어느 가정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현실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거기서 거기인 삶들의 집합이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온통 비교대상 여부에 대한 흑역사다. 한쪽에서는 부족하다고 아우성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유불급이 문제가 된다. 세상에 옳고 그름에 대한 천칭도 없으려니와 많고 적음에 대한 기준도 주관적이며 모호하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으로부터 즐거움과 행복을 얻는다. 반면 아이들로부터 긍정적인 부분을 얻는 만큼 갖가지 상처와 부정적인 감정을 받기도 한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어질 수 있는 관계. 감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도 정리되지 않는 유일한 관계. 그게 부모 자식 사이다.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 관한 법칙마저도 잘 통하지 않는 관계.
자식들 중에는 부모와 합이 잘 맞는 이들도 있지만, 서로 냉정한 타인 대하듯 지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아무리 부모와 잘 맞는 자식들이라고 해서 마냥 긍정적인 면만을 보여줄 수는 없다. 때문에 모든 자식들은 철부지 시절에 자신의 부모에게 예외 없이 화살을 쏜다. 말로 행동으로, 유형으로 무형으로, 웃음과 행복을 준만큼 근심과 불행을 준다.
다른 부모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아이들의 어떠한 언행이 부모들에게 상처를 주는지를 알 수 있다.(입에 담지 못할 상황은 표현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태어나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우리 집은 없는 게 너무 많아!"
"왜 우리 집은 00이네 집처럼 잘 살지도 못하고, 나는 성공한 부모 아래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아빠 닮아서 외모도 그렇고, 엄마 닮아서 성격도 그렇고..."
"엄마 아빠는 무슨 원수지간이야! 그럴 거면 왜 우리를 낳고 지금까지 이 전쟁터를 만들어 놓았냐고!"
"나는 엄마 아빠가 바라는 대로 살지 않을 것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맘대로 살 거니까. 절대 간섭하지 마!"
생각해보면.
그저 자식일 때는 부모 생각을 잘하지 못한다.
그저 부모일 때도 자식 생각을 잘하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시간을 마주할까.
드라마 <빈센조>에서 변호사인 아빠와 딸이 서로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고,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던 딸의 후회가 겹치는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인 빈센조가 아빠를 원망하는 딸에게 던지는 한마디.
"자식이 부모에게 쏜 화살은 한 발도 예외 없이 후회가 되죠."(드라마 <빈센조>의 대화중에서)
자식들은 본인이 부모에게 화살을 쏘고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불평불만이거나 상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할 뿐. 어쩌면 그 나이 그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것은 애당초 보이지도 않을 거니까. 우리 부모들도 그때는 그랬으니까...
아마도 자식들이 부모들에게 쏜 화살을 모은다면 후회하는 만큼 쌓일 것이다. 어쩌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아 후회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아이들로부터 돌아오는 화살을 마주할 때면... 그토록 지겹게 생각했던 부모의 잔소리가 그리워질 수도 있다.
부모의 목소리가 그리워질 때면 안타깝게도 부모의 모습이 희미해졌다는 현실에 절망할 수도있다. 자식들이 후회의 감정에 휩싸일 때면 사과받을 주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후회나 회한>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찌 우리네 삶이 그럴 수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