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코치가 될 것인가, 정서적 지지자가 될 것인가?

by 지성파파

봄꽃은 피고 지고 아이들은 나날이 커나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중간고사의 계절이다. 놀고 즐기기 좋은 시간들 속에는 어김없이 시험이 들어있다. 이 무슨 인생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 아름다운 호시절에 시험공부라니... 그 부담감은 학생들과 부모들, 선생님들 모두에게 딜레마이며 숙명처럼 다가온다.


이는 자본주의적 성취를 위한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치러내야 하는 홍역이 분명하다. 마땅히 지나가야 하는 통과의례지만 여러 질문을 남긴다.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도 철 지난 꼰대의 잠꼬대 정도로 들린다. 과거에 학생이었던 누구나 거의 예외 없이 피하지도 즐기지도 못했기 때문에...


고등학생이 된 큰아들은 누나들의 압박과 엄마 아빠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시험기간 내내 스터디 카페를 드나들며 커피를 가까이했다. 어쩌다 아빠를 보면 자랑하듯이 하루에 몇 시간을 잤는지를 확인시켜주곤 했다. 문득 아들과 대화를 하면서 ’ 4당 5락‘이 진리처럼 회자되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때도 꽃피고 낭만의 햇살이 피어오르던 계절은 공부하기에도 좋은(?) 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아빠의 추억 속에서는 자신의 성과는 끝없이 미화되고, 의미 있는 과오는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아들로부터 온 카톡이 잔망스럽게 울린다.

“야호, 아빠 시험 다 끝났는데.... 돈 좀 보내줘”

“만족스럽게... 잘 보기는 했고???”

“음... 국어는 그렇고.... 영어 수학은 더 그렇고.... 과학은 폭망 했고, 나머지 과목은 글쎄... 그니까 용똔 좀 가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중간고사 준비기간 중 아빠는 각 과목당 자습서와 문제집을 필수적으로 풀어보기를 권했으나, 아들은 시간 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아들은 아직 '복습과 반복의 법칙'을 수용할 생각이 없는듯했다.)


시험을 보기는 봤는데, 결과보다는 저 하늘을 찌를 듯한 해방감과 경쾌함은 어쩔 것인가! 아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시험을 복기하고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라지만.... 호모 루덴스의 유희적 심장을 가진 우리에겐 그런 본능은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의 본능을 성찰한 뛰어난 사회학자였다.


저 고1의 가슴속에는 점수로 표현되는 냉정함의 시간은 없을게 분명했다. 가만히 보니, 우리 아들 또한 여느 아이들처럼 태생적 공붓벌레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지나간 시험에 연연하지 않고, 쿨하게 현재를 인정하고 즐기기 위해 부모에게 용돈을 바라는 저 가상한 용기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안도감이다.


어쩌면 사교육의 열정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음은 더 다행이었다. 부모는 믿고 기다리는 존재라지만,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바라보면 참을 수 없는 인내의 가벼움을 느낀다. 역시나 우리의 삶은 역설 속에 있다.


아들의 중간고사 공부 과정을 지켜보며 아빠로서 아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


"부모들 말 잘 듣고,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번듯한 직장에서 밥벌이를 하는 것"... 일까? 아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을 바랄 것이다. 그저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일 것이다.

그 행복의 근원에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일상을 보내는 것,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지며 자존감을 만들어 가는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원하는 삶 속에는 꿈과 직업이 들어 있을 테고, 추구하는 가치에는 사회적 공헌이나 봉사를 비롯한 의미 있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선택과 책임은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당연한 일이며, 그 개인의 자존감은 흔히 말하는 공부와 대학이나 직업은 소소한 구성요소에 불과할 것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행복을 위한 방식에는 정답이 있을까? 부모들의 삶도 그렇듯이 아이들의 인생 또한 "정답은 없다"가 옳을 것이다. 원하는 만큼, 행하는 만큼의 행복과 만족감이 있을 뿐, 행복에 이르는 정석이나 공식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학의 정석이나 해법수학에서 배운 바대로 공식을 찾아 나선다. 행복을 위한 근의 공식, 행복을 위한 피타고라스 정리, 행복을 위한 미적분과 행렬의 공식들을 낱낱이 새기다 보면 공식만 남고 행복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들 또한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행복을 위한 내 집 마련의 삼각함수, 행복을 위한 노후설계의 3차 방정식...


그래서 행복을 찾는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험난할 수 있겠다. 그것은 부모들이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부모들 또한 해법 없는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근거를 알 수 없는 기시감과 자신감, 약간의 선행적 경험이 버무려진 몇 마디 말로 조언하면서...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 부모들은 적어도 둘 중 하나의 역할을 고민할 것이다.

아이들을 부모가 바라는 세상 속으로 이끌고 가는 것.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세상 속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

혹은 이 양자의 스펙트럼 사이에 놓인 어느 한 점에서 방황할 것이다.


부모들의 내면적 갈등은 자신들의 역할 좌표를 정하는데서 그 정점을 이룬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아이들을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아이들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할 것인가.”


경쟁사회의 치열함을 경험한 부모들일수록 갈등의 폭은 커진다. 아이들이 말하는 내신등급이나 수능 등급뿐만 아니라 경쟁사회가 가진 냉혹함이 부모들의 생각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상위 몇%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사회적 신분이나 연봉의 순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부모들 탓으로 말하기에는 우리 사회는 너무 멀리 와있다. 자본주의적 경제질서 하에서 능력과 경쟁이 가진 결과적 성과를 외면하기에는 우리의 바람이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보통 코치는 경기 혹은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 선수에게 기술과 전술을 훈련하고 교육시키는 역할을 한다. 선수의 개인적인 역량을 최대화해서 경쟁에 최적화된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는 메달의 색깔이나 점수로 귀결된다. 반면 정서적 지지자는 경쟁을 포함한 일상 속에서도 지지받는 이를 지원하고 박수를 보낸다. 지지받는 이의 선택과 의지를 믿고 신뢰를 보낸다. 그 결과는 지지받는 이의 가슴속에 계량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남긴다.


하여 우리 부모들의 마음가짐과 행동방식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끊임없는 선택의 고민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부모인 나는 아이들에게 코치가 될 것인가, 정서적 지지자가 될 것인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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